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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우리는 기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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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05-08 13:06 조회4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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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기억하겠다’는 말은 한국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그것은 고통에 잠긴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면서, 범박한 일상에 젖어가는 부끄러운 나를 깨우치는 다짐의 말이 됐다. 그래서 오늘 감히 말한다. 기억하겠다.

“와, 심하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꽃들이 만발한 4월 첫 토요일, 고속도로는 아예 주차장이었다. 나들목 나가기 전 1.5킬로미터에서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렸다.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으리라. 누군가 말했다. “조바심 내지 말아요. 안산 가는 길이 어디 쉽겠어요.”

우리동네 합창단 파노라마는 지난 토요일, 안산에서 연습을 했다. ‘그날’ 이후 열번째 봄이다. 오는 4월16일 오후 3시, 안산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식이 열린다. 마지막 순서가 기억합창이다. 유가족과 시민이 만든 4·16합창단, 전국·세계 곳곳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참가하는 시민합창단 4160명이 함께 노래한다. 우리도 함께하기로 했다. 지난 토요일은 합동연습의 날이었다. 4·16합창단의 박미리 지휘자는 노랫말마다 곡조마다 뜻과 사연을 들려주며 우리의 노래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연습 후 단원고 가까운 4·16기억전시관을 찾았다. 세월호 참사 후 인근 다섯 마을의 변화를 알려주는 ‘마을의 4·16’이라는 전시였다. 일동마을에서는 매주 촛불을 들었고, 사동은 청소년 공간을 만들었다. 반월동은 매달 기억밥상을 차렸다. 희생자가 두번째로 많았던 와동에서는 미안한 마음에 주민들이 분향소 앞을 지나가지 못했다. 어렵사리 모인 주민들은 펑펑 울었다. 이윽고 ‘이웃대화모임’을 만들었고, ‘주민한마당’, ‘마을학교’로 이어졌다. 100명 넘게 희생된 고잔동에서는 영구차와 언론사 차량 들이 늘 북적댔다.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나왔다. 이듬해 봄, 사람들이 ‘기억꽃집’을 열어 꽃을 나눴다. 꽃집이 고잔동으로, 온 안산으로 퍼졌다. 꽃같이 예쁜 아이들을 기억하는 4월이 됐다. 재난은 깊은 고통으로 지역을 갈랐지만, 마주 잡은 손, 부둥켜안은 가슴도 낳았다. 그렇게 공동체들이 탄생했다.

우리동네 합창단 파노라마도 그렇게 태어났다. 가슴 먹먹하던 그 봄에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분향소를 만들고 촛불을 들었다. 아이들 생일상을 차리고 유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울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어색하게 노래 부르며 행진도 했다. 세월호가 던진 질문을 새기며, 뭐라도 하자고 다짐하곤 했다. 막 태동하던 마을이 세월호를 만나며 조금 단단해졌다. 이듬해 6월, 모이면 술만 마신다며 핀잔 듣던 동네 남자들이 중창단을 만들었다. 여성들도 합류하며 합창단이 됐다. 꽃을 나눈 안산의 마을 사람들처럼 지역에서 노래를 나눴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코로나를 거치며 출석률이 떨어졌다. 계기가 있을 때 모이자며 시즌제로 바꿨다. 시즌제 첫 활동이던 작년 가을에는 지역의 이주노동자센터 10주년 때 축하공연을 했다. 신곡도 불렀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노래하고 음식을 먹으며 친교를 나눴다.

올해 초 세월호 참사 10주기 시민합창단 모집 공고가 나오자 이심전심 참여에 뜻을 모았다. 끼리끼리 알던 멤버의 벽을 허물고 새 단원도 모집했다. 신도시 전부터 살던 원주민들이 왔는데, 우리 동네 초등학교 선후배라니 신기했다. 나고 자란 동네에 이사 온 이들이 누군지 궁금했다며 그이들도 신기해했다. 소식 듣고 찾아온 남성은 합창단 경력이 오래라더니 과연 남성들의 화음이 아름다워졌다. 이주민도 왔다. 동네 협동조합 책방 직원인 일본인 여성은 여덟살, 다섯살 딸들이 하자고 졸랐다며 웃었다. 이주노동자센터의 미얀마어 통역 여성도 딸과 함께 참가했다. 미얀마도 큰 아픔을 겪고 있어서 세월호의 슬픔이 남 일 같지 않다는 말에 서로 마음이 이어졌다. 지역에서 장애인권 활동을 해온 수어통역사는 수어로 노랫말을 전한다. 이사 갔던 이웃도 아들을 데리고 왔다. 마음이 아프던 아들은 이제 많이 나아서 함께 씩씩하게 노래 부른다. 그사이에 일자리도 얻어서 합창단에 기쁜 소식이 됐다. 각양각색 스물다섯명이 함께 세월호를 기억하며 노래하고 있다.

함께 부를 모음곡 ‘세월의 울림’은 어떤 노래일까? 첫 곡 ‘가만히 있으라’는 “가만 가만 가만히 거기 있으라”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기울어진 하늘을 바라보며 “보고픈 엄마 아빨 불렀을” 아이들을 떠올리면 처음부터 목이 멘다. 가만히 있으라는 권력에 맞서 10년을 싸워온 가족들 덕분에 세상이 조금 움직였다. 다음 곡은 ‘네버 엔딩 스토리’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그리움의 말이 사무친다. 그리고 가슴에 찍힌 불도장 ‘화인’을 부른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는 가족의 절규에, “이제 4월은 내게 옛날의 4월이 아니다”라고 우리도 응답한다. 더는 옛날의 우리일 수 없다며.

이윽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부를 차례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던 다짐대로 가족들은 안간힘을 쓰며 버텨냈다. 시민들도 뜨겁게 연대했다. 사상 최초의 특별법 제정으로, 특조위·선조위·사참위 등 위원회 설립과 조사로 이어졌다. 한계도 많았지만 세월호 참사가 배 한 척의 침몰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참담한 실패였음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잊지 않을게’를 부른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이 다짐 앞에서는 어떤 말도 군더더기일 뿐이다. 마지막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다. 세상의 슬픔들에 슬픔으로 손을 내민다. 슬픈 이들이 있는 곳이면 가족들은 어디든 찾아갔고, 세상의 끝에서 함께했다. 노래는 종결의 뉘앙스 없이 4도 화음으로, 4박자가 아니라 3박자째에 불현듯 끝난다. 이 싸움이, 이 그리움이 결코 끝날 수 없다는 듯이.

세월이 가면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세월호의 기억은 세월과 함께 자란다. 10년이 되니 더 선명해졌다. 별이 되고 꽃이 된 이들이 더 빛나는 것처럼. 그날 우리는 보았다. 침몰하던 큰 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이들을. 그날 우리는 보았다. 침몰하던 한국 사회를. 우리는 또 보았다. 안산에서, 전국 곳곳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던 끝없는 줄을. 스스로 만들어낸 거대한 애도의 공동체를. 그리고 함께 만들어온 기억들을. 그날 이후 ‘기억하겠다’는 말은 한국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그것은 고통에 잠긴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면서, 범박한 일상에 젖어가는 부끄러운 나를 깨우치는 다짐의 말이 됐다. 그래서 오늘 감히 말한다. 기억하겠다.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신문 2024년 4월 9일 

https://www.hani.co.kr/arti/PRINT/11359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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