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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거의 모든 슬픔’의 계절에서 오는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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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11-03 16:28 조회6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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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6일 세월호 참사 뒤의 진도 팽목항.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14년 6월6일 세월호 참사 뒤의 진도 팽목항.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제 우리 곁에 없는 작가 존 버거(1926~2017)는 최근의 세상을 두고 “눈앞에 닥친 다음 차례의 습득”, “다음 거래, 다음 융자, 소비자들의 경우에는 다음 구매”가 굴러가게 하는 곳이라 말했었다(‘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열림원, 2017). ‘앞’만 보라고 외치느라 우리가 지금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지 잊어버리고, 차후에 남겨질 이익만을 셈하느라 생생한 현재에 어떻게 머물지는 고민도 하지 않는 요즘 같은 때 더욱 새기게 되는 말이다. 그가 고통스럽게 가리키던, 우리 시대의 ‘역사적 외로움’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과 점점 말살되어가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감각’을 오늘의 자리에 다시 불러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김현의 시집을 읽으며 했다. 김현의 시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에 잠긴 역사에서 온 것이다/ 그 엽서에는 기차 대신/ 탑과 돌과 수양버들과 물빛과 하얀 개가 이어지며/ 영원이라는 글자가 적힌 우표가 붙어 있다/ 종합적으로 그 엽서는/ 기차표 같다 왕복이 아니라 편도로 끊은/ 아내는 그 엽서를 제주에서 사 왔다/ 제주에 갈 때 아내는 한사코/ 배를 탔다 노를 젓고 싶어서/ 그 노동에는 4월의 봄이 있고/ 그 계절엔 거의 모든 슬픔이 있어서/ 아내는 지금도 그날이 되면 운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노를 젓는다 가만히 있기 싫어서/…/ 그 마음 그대로 아내는 제주의 한 소품샵에서/ 그 엽서를 샀다/ 제주의 수려한 풍광이 인쇄된 색색의 엽서들 사이에/ 눈망울이 아름다운 사슴처럼/ 숨어 있던 흑백 엽서를/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젊은 예술가/ 그 돌을 들고 아내는 먼 훗날/ 철로가 물에 잠긴/ 기차역으로 간다/ 달릴 수 없는 푸른 기차를 역에 세워 두고/ 사진 찍게 하는/ 돈을 버는 그런 볼품없는 역으로/ 아내가 그런 역으로 가는 건/ 그즈음 아내의 마음도 물에 잠겨서 볼품없어졌기에/ 거지가 됐기에 아내는/ 그곳에서 미영이의 노래를 떠올린다/ 그러면 쓸 수 있는 것이다 아내는/ 그 엽서에는 이름 없는 시인이 쓴 시가 적혀 있다/ 돌아오길 바랍니다/…/ 아내는 지금 내 속에 잠들어 있고/ 엽서를 들고/ 나는 홀로 기차를 탔다/ 아내에게 엽서를 보내기 위해서/ 그 엽서에는 푸른 기차와 철도원이 있고/ 조용히 별이 뜬다 조용히/ 눈이 내린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엽서는” (‘아내의 엽서’ 부분)

“물에 잠긴 역사”, “거의 모든 슬픔이 담긴” “4월의 봄”으로부터 온 엽서는 “영원”의 우표를 붙이고, “편도로 끊은” “기차표”처럼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과거가 과거로 굳어지지 않기 위해 지금으로 건너온 것이다. 이 엽서는 보내지기 위한 것이긴 하나 아직 부쳐지진 않았다. 수신자가 불분명해서라기보다는, 수신자의 자리를 벌써 차지하고 있는 침묵과 그 침묵이 감싸고 있는 세상의 비밀(내지는 진실)을 엽서의 발신자가 제대로 살피고 싶은 마음에 태도를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딘가로부터 전해지고, 어딘가로 전달되어야 하는 엽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우는 행위가 기념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가며 사진만 찍어 돈을 버는 행위보다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덧없는 그 일이 끝없이 이어지는 ‘영원’의 우표를 품는 일과 닮았다는 것도. 


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23년 10월 13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119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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