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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민주주의의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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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10-06 16:47 조회6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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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짜증 유발하는 도심집회-시위 빈발

시위대의 비애는 행인들에겐 분노로

나와 타인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때

민주주의 뿌리 내려


11시면 이미 늦었고, 10시라도 안심할 수 없다. 주말은 당연하고 평일에도 서울의 남쪽, 특히 한강대교를 건너 광화문 부근까지 갈 때는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오후 2시에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는 정보를 잘못 이해했다가는 중요한 약속을 어길 가능성이 높다. 신고된 집회가 시작되기 서너 시간 전부터 세종대로 세 개의 차선이 차단된다. 전광판 트럭이 도로를 가로질러 자리를 잡고, 크레인으로 중간 중간 대형 스피커를 설치한다. 순식간에 무대와 객석이 생긴다.


한 번이면 통과했던 신호가 서너 번 이상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짜증이 분노로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세계적인 도시 한복판에서 도로를 가로막고 떠들어 댈 수 있나. 이것이 문명국의 수도인가. 무질서한 자유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무는 운전자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폭력과 야만이다.


여름의 광장이나 도로는 용광로다. 태양의 열기를 그대로 받아 복사하고, 집회 참가자들의 뜨거운 숨결이 보태지며, 정체된 차량이 내뿜는 배기가스는 불쾌지수의 연료처럼 공급된다. 에어컨을 설치해도 식히기 어려운 도심에서 그들은 왜 밀집하여 절규하는가? 약속된 집회는 가을이 지나고 눈이 쌓여도 멈추지 않는다.


차 안에서 통행을 방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방관자의 입장에서는 집회 참가자들이 외치는 구호의 진실성이나 허구성보다 그들이 자초한 물리적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폭염으로 흐른 땀이 먼지와 범벅이 되고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아쳐도 길바닥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행진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 장소에 모여 있는 광경에서부터 이질감을 느낀다.


고뇌는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법이다. 안락함 속에서는 삶의 일상적 고통을 인지하기 어렵다. 차량이나 다니라고 만든 도심의 도로에 나서는 사람들은 아스콘 바닥보다 더 황폐하고 메마른 마음속에 돋아난 아픔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그 복합적 상처를 타인은 모른다.


슬픔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용기를 북돋운다. 그 힘으로 길거리에 나선 사람들의 비애는 타인의 눈에 분노로 비친다. 분노를 통해서 슬픔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거기에는 비용이 든다. 민주주의의 비용이다.


내면의 슬픔이 된 상처는 자신과 사회 사이의 갈등이다. 갈등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겪어보지 못한 아픔이므로 공감할 수 없다. 상처받은 사람의 불행은 무엇인가 결여된 상태에서 기인하는데, 그 결핍은 몰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닌 안전과 행복이 들어서면서 빼앗은 자리에 해당한다.


인간 고유의 성격을 실현하는 방식의 하나가 표현이다. 감정이든 이성이든 자기 방식대로 표현한다. 표현이 적극적으로 확장된 형태가 집회와 시위다. 타인에게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방식의 행동은 평화로울지 모르나, 표현의 목적이나 의미를 상실한다. 조악한 방식의 표현에는 그만큼 서글픈 사정이 담겨 있다.


표현의 부재는 우울증이다. 사회적 우울증은 사회의 한 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질병이나 다름없다. 집회나 시위가 행해짐으로써 사회적 비극의 일부를 예방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공동체 전체의 선이 된다.


나와 다른 타인의 행동 양식을 보는 순간 나를 기준으로 그 원인을 따지거나 교정하려 드는 태도는 자기중심적 자유주의의 발로다. 나와 다른 타인의 모습을 우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유에 따르는 의무에 이르기 전 단계에 해당하는 자제의 영역이다. 그런 태도를 기를 필요가 있는데, 그 인내에 지출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비용이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편집인)

법률신문 2023년 9월 14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191198?serial=19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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