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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이성과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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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9-08 12:10 조회7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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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겠다” “못 믿겠다” 진영따라 다른 과학


재판의 영역에서도 인간의 이중성 보여


스스로 현명하다고 확신하는 인간은
전근대적 존재다 


일본에는 온천이 많은 만큼 온천 전문가도 적지 않다. 온천학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추천하는 온천을 수록한 책자도 서점에 가면 쉽게 발견한다.

고모리 다케노리는 원래 방송국 프로듀서였는데, 온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급기야 파헤치기 시작했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일본 전역의 1만 3000개 가량의 온천을 답사했다고 알려져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몇 년 전에는 일본의 온천 중 진짜는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폭로해 충격을 던졌다.


고모리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온천의 순위를 매기기도 했는데, 비중을 두는 몇 가지 점은 흥미롭다. 첫째, 원천수여야 한다. 다른 집의 물을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자기 집에서 솟아나는 물이어야 한다. 이유는 다음 항목들에서 밝혀진다. 원천으로부터 욕탕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급적 공기와 접촉하지 않아야 한다. 배관을 통하더라도 땅속의 물이 사용자의 피부에 닿기까지 가능한 거리나 시간이 짧아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가열가수를 금기로 여긴다. 원천수 온도가 낮아 데워도 안되고, 너무 뜨거워 찬물을 섞어도 감점이다. 50도 이상의 뜨거운 물은 욕조에 도달할 때까지 주름 또는 나선형 호스를 흐르게 하여 식히고, 30도 이하의 물은 냉온천수라는 모순의 이름으로 그대로 사용하기를 권장한다. 마지막으로, 당연히 순환식은 하급이고 거류식을 상급으로 친다. 사용했던 온천수를 여과하여 다시 돌리지 않고, 한 번 탕 속을 거치면 바로 배수구로 가도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원천의 수량이 풍부해야 한다.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온천수는 왜, 어디에 좋은가? 아마도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일 테다. 피부에 좋고, 경우에 따라 혈액순환이나 관절 또는 소화기 기능을 원활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고모리는 온천으로 암을 치료한 여성의 사례를 증언하고,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에는 씻고 마시고 하여 불치의 병을 극복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극적인 치유 효과는 차치하고, 기초 미용에라도 효능이 나타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물이 함유한 성분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온천수는 어떤 것인지 명확해진다. 정교하게 제조한 입욕제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은 입욕제를 푼 욕조보다 수천 배의 비용을 들여 고급 온천 여관을 찾는다. 꼭 물의 성분만이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융통성이 엿보이는 변명을 흘리면서, 슬며시 과학적 태도를 버리고 감성적 제스처 뒤로 숨는다.

이중적인 우리 모습의 한 부분이다. 과학, 그중에서도 화학과 관련해 보더라도 조미료에 관한 이해와 오해의 정도는 온천수보다 더하다. 마음대로 천연, 인공, 화학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장하려는 의미를 왜곡하고 과장한다.

보통 사람들이 과학에 의존하는 경향은 과학자들보다 강하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는 명백한 과학적 사실에 고개를 돌리고 다른 쪽을 선택한다. 플라스틱 상자의 알약이나 약탕기에서 끓는 한약 중 어느 화학 작용을 신뢰할 것이냐도 각자의 뇌 속의 화학 작용이 결정한다. 과학적 결론이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과학과 무관한 현실의 힘이 삶을 지배할 때가 많다. 지금은 우리와 이웃 나라에서 과학을 믿겠다 못 믿겠다로 진영화가 벌어지는 중이다.


과학을 둘러싼 인간 이중성의 현상은 규범과 재판의 영역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이중적 원리에서 오가는 우리의 변덕을 어리석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확신하는 인간은 언제나 근대성을 그리워하는 전근대적 존재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편집인)

법률신문 2023년 8월 31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190720?serial=1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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