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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종이 한 장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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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3-09-08 11:39 조회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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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주민현 지음 l 창비(2023)

 


주민현의 시는 우리에게 입구와 출구를 다른 곳에 두어보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어떤 상황을 이해하고자 할 때 직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의미만을 전부라 여기지 말고, 거듭 생각함으로써 기어코 다른 의미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건네는 것이다. 가령 사물의 구별이 쉽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밤”은 주민현의 시에선 “검은” 형태 그대로 남겨지지 않는다. 시는 오히려 “무수히 많은 빛들의 땅으로 이루어”지는 시간대로 ‘밤’의 의미를 뒤 뒤집음으로써, 진실과 거짓의 판명이 어려운 시절이란 곧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의 여로가 펼쳐지는 때일 수 있음을 알린다. 이는 나아질 기미 없이 가로막혀버린 듯한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든 전환해낼 방도를 찾아 나서자고 독려하는 태도에 가깝다. 

“밤에는 차선을 구별하기가 힘들어지고/ 서로의 실루엣을 가볍게 통과하고// 밤이 검은 건 우리가 서로를 마주 봐야 하는 이유야// 어둠 속에서 이야기는 생겨나고/ 종이 한장의 무게란/ 거의 눈송이 하나만큼의 무게이겠으나// 무수한 이야기를 싣고 달리는 선로만큼 납작하고/ 가슴을 가볍게 누르는 중력만큼이나 힘센 것// 한장의 종이는 이혼을 선언하는 종지부이거나/ 사망신고서/ 찢어버린 편지이기도 하지// 내가 한장의 종이를 들고/ 전봇대 위로 올라가 홀로 전기를 만지던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면// 백만 볼트의 전기가 흘러 당신의 입술과 함께 덜덜덜 떨리면/ 세상이 몹시 외롭고 이상한 별처럼 보이겠지// 아주 깜깜한 밤은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외딴 우주 같아// 하지만 밤을 뒤집어보면/ 무수히 많은 빛들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고// 밤과 새벽 사이 무수한 빛의 스펙트럼을 밟고/ 오늘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무겁다지만/ 이야기를 품은 인간의 무게만 할까,// 어떤 종이에는 불법 점거의 위법 사항이나/ 파산에 대한 위협적인 말들이 적혀 있고// 법률 서적을 성실히 교정보는 오후에// 위법과 과실에 대해, 어떤 치사량에 대해/ 세상은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지// 그러나 낮과 밤 그 사이 시간에는 이름이 없고/ 떠난 사람의 발자취에는 무게가 없고// 외주의 외주의 외주가 필요했던/ 치사량의 노동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홀로 이야기의 성을 맴돌며/ 잠들 수 없는 한 사람의 고독한 뒷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밤에도 어떤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어.”(‘밤이 검은 건’ 전문)시인은 누군가에겐 사소하기 짝이 없는 “종이 한장의 무게”에서 온 우주에 영향을 끼치는 중력을 읽어낸다. “한장의 종이”는 누군가의 목숨을 함부로 종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노동이 가진 숭고한 의미를 지켜주기도 하며, 어떤 경우엔 누군가를 세상의 테두리 바깥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종이 한 장의 무게는 “이야기를 품은 인간의 무게”. 그러므로 “한장의 종이”에서 시작한 어떤 기록을 그 안에만 가두어 둘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발자취로 이해해나갈지 끊임없이 고민할 것.이는 그럴듯한 기록의 외피를 입고 (명료히, 간편히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선호하면서) 너무 많은 죽음을 그저 그런 죽음으로, 그저 그런 삶으로 폄하하는 권력은 끝까지 밤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님을 분별해내지 못할 것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투표용지 한 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장의 종이”가 종내 어떤 말을 그이들에게 돌려줄지 모를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겨레 신문 2023년 8월 11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039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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