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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인]이렇게 친절한 장정일이라니… 젊은 평론가와 나눈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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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9-28 17:21 조회2,7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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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서간집이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그 작가가 장정일이라면 특별하다. 장정일은 현존 작가지만 풍문 속에서 존재하는 작가처럼 보인다. 작가 구속 사태로 번진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비롯해 ‘아담이 눈 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문제작들을 쏟아내며 1990년대를 대표한 소설가였지만 2009년 ‘구월의 이틀’ 이후 10년 넘게 새 소설을 내지 않았다. 시인으로서도 2019년에 27년 만의 신작 시집 ‘눈 속의 구조대’를 출간했을 뿐이다. 2000년대 들어 장정일은 은둔의 서평가로 살아왔다. 책에 대한 글 외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장정일의 공부’와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2000년대 이후 그의 대표작이다.


2000년 이전 젊은 장정일은 너무나 뜨거웠고, 2000년 이후 중년의 장정일은 극적으로 조용했다. 그 장정일이 이제 육십 세가 됐고 서간집 형식의 산문집을 발표했다. 이 책은 장정일의 사생활을 처음으로 드러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들로 가득 찬 집에서 원하는 책을 찾지 못해 투덜거리고, 수요일마다 동네 목욕탕에 가서 몸을 담근 채 헌책방에서 사들인 시집들을 읽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음악을 듣고, 휴대전화도 없이 살아가는 장정일을 엿볼 수 있다.


장정일은 이 책에서 자기에 대한 글을 쓰는 어려움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다. “나를 드러내는 일이 어색하고 불길했어요… 허구의 형식이 아닌 형식으로 자신을 말하기까지 저에겐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장정일을 대화로 불러낸 건 문학평론가 한영인(38)이다. 그는 장정일이 시 ‘강정간다’로 데뷔하던 1984년에 태어났고, 2014년부터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한영인의 첫 책이다.


두 사람은 제주도에서 만났다. 2020년 여름 한영인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었고, 장정일은 제주도에서 집을 빌려 머물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서 기거하던 두 사람을 소설가 김유담이 만나게 해주었다. 한영인은 대학원 시절에 ‘장정일 초기 소설의 문제성’이란 평론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장정일은 “박제된 ‘문학사’의 한 조각”처럼 아득한 사람이었다.


장정일은 둘의 대화가 시작되던 순간을 이렇게 전한다. “형하고 저는 학연도, 지연도 없고 세대차마저 크군요. 어떻게 보면 초면의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만 있었죠. 종이 위에 뭔가를 써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그로부터 행복을 느낀다는 것.”


두 사람의 편지는 지난해 장정일이 서울로 돌아온 후부터 시작된다. 편지 교환은 1년여에 걸쳐 열두 차례 이어졌다. “장정일 선생님께”와 “한영인 형께”로 각각 시작되는 편지는 안부를 묻고 일상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해 주로 책 이야기로 향한다. 어떤 책이나 작가에 대한 분석, 한국문학에 대한 비판, 사회와 세태에 대한 비평, 글 쓰는 삶에 대한 소회 같은 것들이 펼쳐진다.


한영인은 이 책에서 장정일의 보조에 머무르지 않는다. 장정일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차이를 얘기하고 초점을 심화하고 주제를 확장해 나간다. 둘은 작품에 대한 평가나 투표, 조국사태 등 정치에 대한 관점에서 불일치하는 경우도 많은데 한영인은 그 다름을 단단하고 정확하게 펼쳐 보인다.


장정일이 다듬어낸 생각들은 여전히 날카롭다. 현재 한국문학을 “거짓되진 않지만 동시에 진실도 없는 이야기”로 요약하고, 문화와 문학이 체제와 자본에 봉사하는 현실을 경고한다. “체제의 포로니, 자본의 노예니… 하고 말들을 하면서 거기에 대한 항체로 문화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를 체제와 자본에 접속시키고 동화시키는 게 바로 문화죠. 문화 없이 어떻게 체제가 유지되고 자본이 굴러가겠어요.”


달라진 게 있다면 장정일의 글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친근하고 편안하다는 점이다. 위악이나 독설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변화는 편지라는 형식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이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는 “인간은 잘났든 못났든, 다들 조금씩 배우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마지막엔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야죠”라고 썼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국민일보 2022년 9월 8일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62932&code=13150000&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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