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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김종철과 ‘고르게 가난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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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6-02 13:45 조회3,2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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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나의 가난은’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으로 시작하는데, 2연 1행은 반대로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하는 것은”이다. 시인은 가난이 주는 행복과 설움을 동시에 말한 다음에, 3연에서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행복과 설움을 함께 주는 가난이 시의 길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4연은 “내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남기는 말의 형식이다. 여기서 시인은,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기억되기를 바라며, “아들딸들”의 삶에도 “씽씽 바람 불어라”고 기원한다. 다르게는, 시인 자신의 삶에 “씽씽 바람”이 불었다는 느낌도 준다. 실제로 가난은 들판과 같아서 “씽씽 바람”이 부는 생기로 가득할 수 있다. 가난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이반 일리치는, 서양에서는 “12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가난이라는 용어는 주로 덧없는 사물에 대해 거리를 두는 태도를” 가리켰다고 전하면서 “가난이 경제적 조건을 의미하기보다 가치 있는 태도를 주로 의미”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언어는 언제나 그 시대의 맥락을 품고 있음을 십분 고려해야 한다. 일리치의 지적이 사실에 가깝다면, 이후 역사는 ‘가난’이라는 언어의 광주리에 많은 사건과 상처를 담아줬고 결국 그 말의 뜻이 변하고 말았다는 뜻이 된다. 그건 그렇고, 오늘날 우리에게 강요된 가난, 즉 경제적 빈곤이 그치지 않고 생겨나는 원인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실천이 된다. 단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는 경제적 빈곤을 끝없이 양산하거나 또는 (내)외부 식민지에 전가해야만 존립하는데, 마르크스가 “자유로운 ‘노동빈민’”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것은 “근대사의 인위적인 산물”이라고 지적한 데서 일부 드러나듯이, 역설적으로 경제적 빈곤은 공동체의 관여와 보호가 사라진 ‘자유로운 노동’과 관계가 깊다.

진보 ‘덧없는 사물’로 난폭한 여정 

이런 경제적 빈곤으로서의 가난은 일리치가 말한 가난, 즉 “덧없는 사물에 대해 거리를 두는 태도”로서의 가난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도리어 “덧없는 사물”에 대한 병리적 집착을 낳는 가난으로 그 의미가 전도된 것이 그간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가난은 “덧없는 사물”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은폐하고자 한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가 생산한 “덧없는 사물”(상품)을 소비하도록 강요한 데 따른 것이며, 인간의 노동마저 “덧없는 사물”(노동력)로 추락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제적 빈곤으로서의 가난을 벗어나려면 “덧없는 사물”로부터의 이중해방, 즉 자기 자신을 상품화해서 다른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의 ‘진보’는 “덧없는 사물”을 향한 난폭한 여정이 아니었던가.

더 큰 문제는 “덧없는 사물”의 누적이 가져온 결과인데,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위기와 팬데믹은 그것의 최종 버전이다. 지금껏 자본주의는 경제적 가난을 벗어나려면 경제성장이 계속 필요하다고 속여 왔지만, 경제성장은 우리 삶의 터전을 무단히 파괴해왔고, 맑은 공기와 강을 더럽혀왔으며, 결국 이것들이 집적돼 오늘의 사태에 이르고 말았다. 이것은 “근대사의 인위적인 산물”의 극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연히 경제적 빈곤으로서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본주의는 경제적 빈곤 없이는 한시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작고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오래전부터 이 악무한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레바논의 사회주의 혁명가 카말 줌블라트의 말을 빌려 ‘고르게 가난한 사회’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는 ‘가난’은 아마 “덧없는 사물에 대해 거리를 두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고르게’는 민주주의와 다름 아닐 터인데, 김종철의 민주주의는 경제적 빈곤을 강제하는 경제성장과 양립 불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철의 길 가면 악무한서 탈출

그에게 민주주의는 ‘우애와 환대’라는 공동체 문화 속에서 민중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인데, 그를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삶이 보장, 제공되는 사회가 바로 ‘고르게 가난한 사회’이다. 그것을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말해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강제노동을 줄이는 대신 기쁨과 자기 함양을 위한 노동을 하는 세계가 ‘고르게 가난한 사회’이지 경제적 빈곤이 보편화된 사회가 그것일 리 없다. 또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위함이 아닌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타는 가뭄의 복판에서, 기후위기를 막는 근본적인 방책은 재생에너지 ‘산업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바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황규관 시인

한겨레신문 2022년 5월 30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053003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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