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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정] 미국과 탈레반의 ‘천연가스’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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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9-15 14:56 조회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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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은 정부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이 파이프라인 사업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카불을 점령한 직후에도 대변인의 입으로 “장기적 우선 사업”임을 강조했다. 탈레반이 다시 파이프라인 사업 해결사를 자임한 것이다. 미국의 철군은 더 이상 탈레반과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시이기도 하다.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1987년 미국산 노새 700마리가 파키스탄의 험준한 산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사육된 노새들이 왜 이역만리에서 산행을 하고 있었을까? 최근의 미군 철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노새들은 테네시주 미 육군 기지에서 파키스탄으로 긴급 공수되어 식량, 의복, 의약품뿐만 아니라 무기들을 등에 싣고 이동 중이었다. 목적지는 아프가니스탄.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활동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데는 노새만큼 훌륭한 운송수단이 없었다. 비록 운송수단은 전근대적이었지만 미국이 제공한 것은 스팅어 미사일과 같은 최첨단 무기 체계였다.


그 무자헤딘이 싸우고 있던 적군은 소련이었다.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즉시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때문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소련제 무기를 제3국에서 조달해 공급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아예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들을 ‘자유의 전사’라고 불렀다.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8년간 20억달러가 넘는 지원을 퍼부었다. 미국은 사실 1980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새까지 동원한 지원에 힘입어 ‘자유의 전사들’은 소련군을 물리쳤다. 곧이어 소련이 붕괴하자 이 지역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와 원유를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세계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을 동시에 ‘물먹일 수’ 있는 묘수였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파키스탄에 이어지고 인디아까지 연결되는 다국적 파이프라인 계획이 탄생했다. 문제는 아프가니스탄이 내전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는 점이었다.

무하마드 오마르가 해결사로 나섰다. 부패로 찌든 군벌들을 타도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겠다며 탈레반을 결성했다. 1994년 지지자 단 50명으로 출범했지만 2년 만에 내전을 평정했다. 탈레반이 혜성과 같이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내전에 지친 아프간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의 은밀한 지원도 일조했다. 오마르가 ‘자유의 전사’로 소련과 싸우며 정치지도자로 부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국제개발처가 이슬람 교리와 폭력을 융합해 폭력을 조장하는 교과서들을 제작·배포해, 탈레반의 성장에 일조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권력을 장악한 탈레반은 1998년 1월 유노칼이라는 미국 에너지회사가 주도한 사업단을 선택해 파이프라인 계획을 추진했다. 승승장구하던 미국은 이때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났다. ‘자유의 전사’로 소련과 싸웠던 오사마 빈라덴이 이제는 반미전사가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이라크를 침공·점령하는 등 ‘중동의 맹주’로 등극한 미국을 무슬림들은 침략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이 폭탄 테러 공격을 받았다. 오사마 빈라덴이 배후인물로 지목됐지만 탈레반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에 파이프라인 사업은 공중분해됐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부시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탈레반을 축출한 데서 파이프라인 사업의 그림자를 보는 사람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 구성된 아프간 정부는 서둘러서 2002년 투르크메니스탄 및 파키스탄과 파이프라인 계획을 체결했다. 미국이 지원을 공언하고 아시아개발은행이 재원의 상당 부분을 맡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 내전 때문에 사업은 쉽게 진척되지 못했다. 2018년 초에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착공식이 열렸다. 흥미롭게도 탈레반은 정부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이 파이프라인 사업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올해 초에는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표단을 파견해 이 사업에 대한 협조를 다시 확인했고, 카불을 점령한 직후에도 대변인의 입으로 “장기적 우선 사업”임을 강조했다.

탈레반이 다시 파이프라인 사업 해결사를 자임한 것이다. 미국은 급하게 철군하기는 했지만 평화협상의 대상은 탈레반이었다. 철군은 더 이상 탈레반과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시이기도 하다. 7월 중순에는 투르크메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5국과 5+1회담을 하고 이 지역을 남아시아로 연결하는 사업들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의 뜻대로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중국과 러시아, 이란 등이 탈레반에 손길을 내밀면서 이 지역은 국제정치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미국의 아프간 철군을 두고 한국에서는 설익은 비교가 횡행한다. 우선 정확히 알고 깊이 이해해야 한다.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 2021년 8월 23일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8674.html#csidx8ac9578e1ca5d34afd6f5e918f68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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