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침묵하는 이들을 위하여 > 회원칼럼·언론보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회원로그인

회원칼럼·언론보도

[이일영] 침묵하는 이들을 위하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8-07 16:11 조회177회 댓글0건

본문

어려운 시절이다. 일상생활에서조차 균열과 상처가 깊다. 진보성향 사람들 사이에서도 검찰, 부동산, 젠더 등 문제에서 의견이 확연히 갈라졌다. 극단의 주장이 충돌하지만 실제 현실은 중간지대가 넓다.

 

부동산만 하더라도 교과서에서는 ‘이질성’을 첫째 특징으로 꼽는다. 복잡하게 분절된 시장이 사다리처럼 연결되어 있다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아마 여성학에서도 인간을 가부장주의자와 페미니스트로만 갈라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다. 그리고 이들이 또 얽히고설켜서 산다.

 

박원순 시장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가까워 온다. 지칠 줄 모르고 일하던 그의 돌연한 유고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아직도 이성·감정으로 그와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중에 미투 사건을 다루는 좌담의 사회를 요청받았다. 먼저 침묵해야 한다는 본능이 작동했다. 그리고 주어진 현실의 공부를 회피하지 말라는 가르침도 생각났다. 질문에 충실하고 배우기로 했다. 그것이 내 나름의 애도 방식이다.

 

당초 기획은 지난 2년의 미투 사건을 돌아보는 글과 좌담을 자료와 함께 묶어 책을 내자는 것이었다. 원고 청탁은 난관이 많았다. 좌담도 겨우겨우 이루어졌다. 참석자는 원숙한 여성운동가, 젊은 지역활동가, 정당활동가였다. 왜 이렇게 자리를 만들기가 어려운가를 묻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예민하고 화가 나 있다. 서로 공격하고 상처 받고 다시 수위를 높이는 악순환이 심화되고 있다. 또 이러한 대결구도에 말려드는 두려움이 크다. 전형적인 단톡방 사례가 거론되었다. 누군가 추모하는 글을 올린다. 그러면 바로 누가 들이받는다. 또 치고받고 하는 사이에 몇몇은 말없이 단톡방에서 탈퇴한다는 것이다. 방에서 나간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못하겠다”고 한다. 사회 전체가 싸우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말 못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

 

참석자들은 박원순 시장을 다른 가해자들과는 달리 진실로 남성 페미니스트였다고 평가했다. 여성과 아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박 시장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정당 내 위계·위력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 권력이 만들어내는 폭력성은 교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한다. 박 시장도 권력의 폭력 구조에 어느새 적응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이들은 진지한 박 시장이 이러한 상황과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생존책을 모색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박 시장이 권력 구조 속에서 침식되고 있다는 징후를 느끼던 사람도 많았다. 박 시장의 능력과 일 처리 방식은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부심도 더해진 것 같다. 듣는 정책 토론회는 박 시장이 자랑하는 브랜드였다. 그런데 갈수록 불통이 심해졌고 이너서클 위주로 폐쇄적 결정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 참석자의 지적이 통렬했다. 비판의 말을 꺼리고 안 듣는 것은 권력이 흔들릴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처음엔 말을 안 듣다가 나중엔 말을 못하게 하는데, 그게 폭력이 된다고 한다.

 

어느 경우든 피해자에게 완벽한 인격을 요구하지 말라는 당부도 이어졌다. 위계구조하에서 부당한 일에 즉각 항의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했을 수 있다. 또 누구나 생존과 경력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피해자를 두둔할 필요는 없으나 피해를 부인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들 끊임없이 어느 진영에, 누구에게 더 가까운가를 질문받고 있는 상황이다. 누구도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번에 배운 점은, 그럼에도, 침묵하는 이들이 조금씩이라도 겸손하게 자기 생각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결국 공공성, 공동영역, 공동감각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신문 2020년 8월 6일

원문보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060300055&code=99010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Segyo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TEL. 02-3143-2902 FAX. 02-3143-2903 E-Mail. segyo@segyo.org
04004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로12길 7 (서교동 475-34) 창비서교빌딩 2층 (사)세교연구소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