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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정] 휴전선을 보고 욕이라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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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10-07 12:08 조회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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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식 강연에서 말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유지였다. 나쁜 정당에 표를 주지 않을 수도 있고, 나쁜 신문을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집회에 나갈 수도 있고, 인터넷에 댓글을 달 수도 있으니,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많은 시민이 엄청 많은 일을 했다. 담벼락에 대고 욕을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강한 공권력을 휘두르며 그 뒤에서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는 정권들에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차벽 앞에서 노래를 했고 물대포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적폐의 코앞에 촛불을 들이댔다. 촛불을 앞세운 시민의 행진에 결국 경찰차벽도 무너졌다. 적폐의 한 모서리도 쓰러졌다. 구약에서나 보는 것인 줄 알았던 ‘기적’이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촛불의 행진이 가야 할 길은 멀다. 검찰개혁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치개혁만이 과제가 아니다. 한반도의 전쟁 상태는 아직도 강고하게 남아 있다. 평화를 약속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평화를 만들 아이디어가 없어서도 아니다.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미 모두 입에 달고 있는 평화와는 반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판문점에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선언했다. 9월에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전쟁 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관계 해소”를 이루어 한반도를 “항구적인 평화 지대”로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여러 가지 구체적 조처를 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그 중간인 6월에는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만나 북-미 관계를 평화적인 새로운 관계로 세우고 “한반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1년을 훌쩍 넘겼지만 그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물론 남북 합의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의 소중한 성과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와 자유 왕래는 얼마나 멋진가. 그 덕분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번개 미팅도 가능하지 않았는가. 남북은 함께 비무장지대 내 초소를 철거하고 66년 넘은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정전협정 위반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한국과 미국은 연합군사훈련을 강행했고 한국 국방부는 앞으로 5년 동안 290조원을 투입할 중기계획을 채택했다. 선제타격에 유용할 F-35A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F-35B를 염두에 둔 항공모함 개발계획까지 추진하고 있다. 북도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방사포 개발과 시험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2일에는 잠수함 탄도미사일까지 시험 발사했다. 모두 군사 분야 합의서와 판문점 선언의 합의 내용과 정신을 무시하는 행동들이다. 평화와 반대되는 걸음이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북-미 관계의 수립을 약속했지만 과거의 적대관계는 바꾸지 않았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합의했지만 이에 따른 행동도 보기 힘들다. 적대관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대북 제재 조처를 오히려 계속 추가하고 강화하고 있다. 합의와 반대로 간다.

 

미국은 제재를 집행한다는 명분으로 군함과 정찰기 등을 동원해 북 선박의 환적과 이동을 감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엔사령부를 통해 다국적 군사작전으로 확대하고 있다. 유엔사령부에 속한 영국, 프랑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물론 한국과 일본의 함정과 비행기가 남중국해에 동원된다. 일본 방위성에 따르면 9월까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캐나다는 함정 14척을,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캐나다, 뉴질랜드는 항공기를 8회 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국가의 함정과 항공기는 유엔사령부 행정협정을 준용해 일본 가데나와 사세보의 미군 기지를 거점으로 쓰고 있다. 유엔사 재활성화 프로그램의 지향점을 보여주지 않는가.

 

해서 스티븐 비건 대북 특사의 미시간대학 연설이 이례적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겠다는 ‘평화를 통한 비핵화’ 접근을 언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말만으로는 평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의 행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유다. 북-미 관계의 진전에 목을 매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남북이 앞장서서 한반도 평화를 개척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휴전선을 바라보고 욕이라도 하라.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신문 2019년 10월 7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2180.html#csidxcd11a8eee0db0039ad0c5006ac323c5 onebyone.gif?action_id=cd11a8eee0db0039ad0c5006ac323c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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