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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바이마르 공화국 백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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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8-16 12:55 조회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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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백주년인 올해, 대일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놓였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이번 사태가 강제징용이라는 ‘인권’ 문제로 촉발되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노동권을 규정한 세계인권선언 23조는 전쟁 때 발생한 강제노동의 폐해를 반성하며 만들어졌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는가 하는 문제는 법절차에 초점을 둔 쟁점이다. 더 크게 보면, 이차대전 후 인권은 시간상으로는 과거사로, 공간상으로는 전세계로, 내용상으로는 사회권과 연대권 영역으로 확대·순환되면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인간 자유의 세계사적 확장을 수용하느냐, 구시대적 아집을 고수하느냐 사이의 충돌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과거사를 대하는 아베 정부의 태도와 독일의 태도를 비교한 논의가 많이 나왔다. 독일이 일본에 비해 적극적으로 과거사 청산에 임해온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주변국과 피해집단에 대한 대외적 행동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다. 대내적으로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성찰, 실행하는 노력, 그리고 격렬한 논쟁을 극복하면서 확보한 동력을 바탕으로 대외적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봉기 기념탑 앞에서 브란트 총리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광경을 많은 이가 기억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 국내의 보수 여론이 반발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역사 논쟁도 심했다. 처음부터 모든 독일인이 한목소리로 반성한 게 아니었다. 반세기 넘게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삶의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면서 새로운 세대를 꾸준히 양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 역시 올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정표의 해다. 이번 달에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제정 100주년이 되고, 11월에는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맞는다. 현재 베를린의 독일역사박물관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을 주제로 민주주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바이마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상주의적 헌법과 무질서한 현실, 무책임한 정쟁정치, 최악의 경제상황, 외교적 사면초가 등 부정적 서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전시회는 그런 통념을 뒤집는다. 비록 실패하긴 했어도 민주주의 수준이 높았고, 그 정신만큼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특별전은 ‘바이마르―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라는 제목을 달고 전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더 이상 당연시되지 못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민주정치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들도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시점에서 독일인들이 느끼는 민감한 정치의식을 반영한 전시회다.

 

1919년의 총선에서 사상 최초로 여성과 군인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득표율 37.9%의 사회민주당, 19.7%의 중도당, 18.5%의 중도좌파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극우와 극좌를 제외한 진보파와 범민주파의 승리였다.

 

그해 8월11일에 선포된 헌법은 유럽 최고 수준의 기본권과 자유를 규정했고 전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모든 독일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라는 109조에 의해 인간 평등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헌법적 기본권으로 격상되었다. 사회국가 원칙이 수립되었고, 실업급여보험이 제도화되어 민주주의의 실질화가 진전되었다. 도시계획, 공공주택, 도시텃밭도 이때 시작된 개혁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을 흔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고 조롱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분야와 차원에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지키려 했다. 예를 들어, 1922년 발터 라테나우 외무장관이 암살당하자 전 국민이 항의에 나설 정도였다. 베를린에서 열린 공화국 수호 결의 대회에 나온 수십만 민주시민들의 사진은 전시회를 통틀어 제일 감동적인 자료다.

 

그런데도 왜 공화국이 실패했던가. 반동적인 수구 언론들이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민족주의적 혐오를 선동했다. 극우와 극좌가 공화국을 시도 때도 없이 흔들었다. 공화국보호법이 제정됐지만 사법부는 이 법을 주로 극좌파 처벌에만 적용했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고 실업률, 인플레가 하늘을 찌르자 반공화파들은 마치 이 모든 고통이 정부만의 책임인 양 공격을 해댔다. 프랑스혁명이 모든 근대혁명의 원형이 된 것처럼, 바이마르는 모든 실패한 민주체제의 원형이 되어 버렸다.

 

전시회의 제목을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헌법학자였던 한스 켈젠이 1920년에 쓴 동명의 저서에서 따온 것이다. 전시회의 마지막 순서에 이 책의 한 구절이 전시되어 있다. 켈젠은 요한복음 18장에서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심문하던 이야기를 화두로 삼는다.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려 했지만 군중이 도둑 바라바를 원한다고 요구하자 하는 수 없이 그 뜻을 따랐다는 일화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다수결’에 의해 신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재판의 전말을 기술한 후 켈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확신에 찬 정치적 신념가라면 이 사례를 민주주의 지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반대 논거로 이용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순 있겠지만,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정도로 확고하게 자기주장을 하려면 자신의 정치적 진리―필요하다면 정치적 권력으로 강제해야 하는―가 옳다는 것을 신의 아들만큼이나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전시회의 결론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가치의 다원성과 상대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서로 타협하는 데에 있다는 켈젠의 테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에 가깝다. 타협은 더러운 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패스워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켈젠의 결론은 오늘날 상황에 비추어 너무 점잖고 이상적이다.

 

첫째, 민주주의 체제 내의 정당한 반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주제도를 악용하려는 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과 타협할 수 있을까. 타협가능한 민주주의의 경쟁자와, 타협불가능한 민주주의의 적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그것에 실패해서 나치 집권의 대참사가 발생하지 않았던가.

 

둘째,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 주장, 가짜 뉴스, 혐오·증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조건을 개선하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차별과 희생양 만들기와 극혐적 표현에 사람들이 쉽게 유혹될 만큼 경제사회적 바탕이 악화되어 있다면 민주주의는 공염불에 빠지기 쉽다.

 

7월20일은 군부에 의한 히틀러 암살 기도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기념식에서 모든 시민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우파의 준동에 반대할 ‘의무’가 있다고 호소했다. 최근 신나치에 의한 정치인 암살이 발생할 정도로 독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 추산으로 2만4천명의 극우파가 있고, 그중 1만3천명이 폭력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한다.

 

이 지점에 독일의 고민이 있다. 민주주의 실천과 역사 청산이 모범적이라고 인정받는 성공담 속에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싹트고 있는 역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취할 교훈은 명백하다. 민주주의는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자전거다. 그리고 페달을 계속 밟기 위해선 각 세대마다 새로운 도덕성과 사회경제적 근육이 필요하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한겨레신문 2019년 8월 13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5611.html#csidx49717c635ce645dad9953e27ea6e3e7 onebyone.gif?action_id=49717c635ce645dad9953e27ea6e3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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