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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경제정책이냐 인권정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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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4-25 12:57 조회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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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이 경제계 원로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의견을 들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러 쓴소리와 제안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중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발언이 흥미로웠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 인권정책이다.” 경제계에서 인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보다 더 솔직하게 말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한다.

 

명망 있는 경제학자가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다면 대다수 경제인들이나 경제 전문가들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해 얼마든지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경제와 인권 간의 관계에 있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떤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 인권정책이다”라는 언술에 깔려 있는 기본전제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권정책은 대체로 이상주의적이고 대중영합적이며 비현실적이기 쉽다. 반면 경제정책은 현실적 타당성과 경제 패러다임의 내적 논리에 따라 추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정책을 인권정책과 같은 식으로 다루어선 안 되고, 두가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꿈꾸는 아마추어 식으로 경제를 운용하지 말라는 주문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딱히 인권정책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인권정책과 비슷한 경제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던가.

 

어째서 불평등과 중산층 몰락과 청년실업과 주거난과 출산율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가. 국가인권위가 2016년 실시한 대규모 국민인권의식 조사에서 왜 응답자 중 절대다수가 사회보장 확대에 찬성하고, 비정규직 차별에 반대했으며, 어째서 최저시급 인상에 찬성한 비율이 무려 91.4%나 나왔던가. 국민이 원하는 대로 인권정책처럼 경제정책을 추진한 게 잘못이었다면, 그 이전의 수많은 (인권정책과 달랐던) 경제정책들은 사람들을 얼마나 살 만하게 만들어 주었던가.

 

더 나아가, 경제정책과 인권정책을 완전히 가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 공정한 질서가 필요하고, 지속가능한 시장경제를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근로조건이 마련되어야 하고, 경제성장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위한 수단이라고 대한민국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경제가 대다수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최근 다시 부각된 데에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전세계와 한국을 지배해온 터보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심각한 폐해가 있었다. 심지어 다보스 경제포럼조차 전지구적 불평등의 악화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의 약탈적 사업 관행과 천문학적인 투기성 경제 방식을 통제하기 위해 유엔이 주도한 글로벌 콤팩트가 2000년에 나왔다. 아무리 돈벌이가 중요하더라도 환경과 노동과 인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윤리경영 원칙이었다.

 

글로벌 콤팩트의 취지를 확장하여 유엔 인권이사회는 2008년 유엔사무총장 특별대표인 존 러기 교수가 마련한 ‘기업과 인권을 위한 프레임’을 채택했고, 2011년에는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경제정책과 인권정책을 연결시키려는 중요한 국제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지침은 세개의 개념적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국가는 제3자에 의한 인권침해로부터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제3자는 초국적기업을 비롯한 모든 사업체를 말하며, 의무는 법적·정치적 책무를 뜻한다. 둘째, 기업은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기업이 사업을 벌일 때 소비자를 비롯한 모든 관계당사자들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사업활동으로 부정적 영향이 초래되지 않도록 적절한 주의를 다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할 책임이 있다. 셋째, 권리가 침해된 사람은 구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기업 활동의 피해자가 사법, 행정, 입법 조처를 통해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고, 기업은 사업활동으로 권리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과 보상 책임을 져야 한다. 삼성반도체 노동자 산재 사건의 전말을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의 틀에 적용시켜 보면 지침의 구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유엔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과 구분되는 별도의 <기업과 인권 NAP를 위한 안내서>를 2015년에 펴냈다.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는 2017년의 <일반논평> 24호에서 기업과 인권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뤘고, 같은 해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의 공동선언문에서도 ‘지속가능한 글로벌 공급망’에 관한 언급이 포함됐다.

 

이처럼 지난 몇년 사이 기업과 인권, 인권경영 등의 키워드가 국제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고 각국 정부도 비상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인권정책과 경제정책을 분리해서 파악한다면 세계적 동향으로부터 한참 뒤떨어진 인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기업과 인권에 관한 논의가 점점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제2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 2012~2016’에 기업과 인권 항목이 처음으로 포함되었고,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 2018~2022’에서는 기업과 인권을 독립된 장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에 따르면, 기업에 인권 존중 책임이 있다는 점을 교육·홍보하고, 사회적 책임을 고려한 공공조달, 생활제품 안전 확보, 기업의 양성평등 경영 지원, 해외진출 기업의 현지노동자 인권침해 방지,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소비자 친화적 리콜제도 등이 기업 활동의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서울교통공사, 한국가스공사, 국민연금공단, 부산항만공사, 전남개발공사, 천안시설공단 등 여러 공기업에서 ‘기업과 인권 이행 지침’을 연구하고 현장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민간 기업체에서도 이행지침의 실행을 위해 전문가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기업 활동을 넘어 정부의 경제정책 자체를 인권원칙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입안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과감한 제안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논의된 ‘경제개혁 정책의 인권영향평가에 관한 이행지침’이 대표적인 시도다. 이번 제안은 그 어떤 경제정책도 사람들의 기본권, 특히 여성, 빈곤층, 사회 취약계층의 인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고 하는 원칙을 지켜야 하며, 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국가의 존립 목적이자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유경제에서의 ‘자유’는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한다는 조건 내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빈곤과 생계 문제로 시름시름 고통받는 현실을 인권학자들은 ‘슬로모션의 폭력’ 또는 ‘백만개 상처에 의한 죽음’이라 부른다. 인권영향평가가 제도화되어 기획재정부와 국가인권위 직원들이 이런 사회적 고통을 경감할 방안을 놓고 일상적으로 머리를 맞댈 때가 머잖아 올 것이다. 경제정책과 인권정책은 다르다는 생각이 오래전의 에피소드로 회자될 날을 기다린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국인권학회장

 

한겨레신문 2019년 4월 23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91160.html#csidxde97bc87012bb719f3373d2e80e9e1e onebyone.gif?action_id=de97bc87012bb719f3373d2e80e9e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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