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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경] 평화에 대한 불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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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1-08 11:42 조회33,0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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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라는 이름은 허구다. 오히려 군사무장지대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사시설과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이곳에서 지난달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여러 차례 폭발이 목격되었다. 모두의 무의식에 잠재된 불안감이 꿈틀거릴 찰나, 남북 대치의 상징물인 감시초소 여러 개가 사라진 것을 목도한다. 바야흐로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흥미롭게도 북한은 감시초소 철거 방식을 ‘폭파’로 결정했다. 그것도 10개의 감시초소를 동시에 ‘폭파’함으로써 분단 시대의 종말과 탈분단 시대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천명했다. 절묘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폭파’라는 스펙터클은 과거의 흔적을 지워내고 전혀 다른 미래를 암시하는 데 반복적으로 활용된 바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 세인트루이스 프루잇-아이고(Pruitt-Igoe) 아파트의 폭파 철거는 모더니즘 이후의 사회, 즉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탄생을 의미한다. 대량생산, 합리성에 바탕을 둔 이 거대한 아파트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순간, 효율을 추종해온 근대 기획의 유효기간이 끝났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감시초소 ‘폭파’를 지켜본 대부분은 탈분단 사회의 도래는커녕 분단 시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조차 감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동안 군사보호구역으로 막혀 있던 서해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남북 조사가 본격화되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감격하지 않는다. 상호 비방 금지와 군사적 긴장 완화 등의 합의를 담은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는 역사상 가장 진일보한 군사합의임에도, 그 의미는 왜곡폄하되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무시되는 듯하다. 이는 단순히 정부의 홍보 부족 때문만은 아니리라. 분단과 정전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 단련해온 분단 불감증이 더 근원적인 원인일 터이다.

 

적대 상황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온 우리 모두에게 군사적 적대 행위를 그만두는 것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올 리 만무하다. 하긴 정전 체제라는 사실상의 전쟁을 계속해온 한반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분단에 대한 무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시적인 불안과 두려움에서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었을 테니까. 거기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대부분에게 분단은 마치 비무장지대라는 군사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화된 지 오래다. 경제라는 일상적 전쟁터에서 친구, 동료 가리지 않고 경쟁해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에게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는 비현실적이지만 당장 내달이면 나올 성과급과 재계약 등은 현실 그 자체다.

 

분단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하물며 도래하지 않은 평화를 감각하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껏 평화롭지 않은 한반도에 익숙한 우리에게 평화라는 상태가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일상을 얼마큼 바꿔낼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시시때때로 두려움이 엄습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남북 정부가 아무리 구체적인 성과를 이뤄낸다고 해도 분단·평화 무감각증을 앓고 있는 모두의 마음은 앞으로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평화라는 새 시대와 분단이라는 구시대가 공존하는 이 혼란기를 놓치지 않고 분단에 기생하는 과거 세력들은 시민들의 불안감을 더욱 자극할 것이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상 속 분단을 알아챌 예민한 감각과 미래를 평화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키우는 것이다. 아주, 아주 길게 계속될 이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김성경(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겨레신문. 2018년 12월 12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4175.html#csidx85e78add9c7cf118dd66e277cadfe74 onebyone.gif?action_id=85e78add9c7cf118dd66e277cadfe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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