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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산 사람이 살 만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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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11-28 16:26 조회33,3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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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보면 가난하게 시작해 조금씩 땅을 넓혀가던 한 농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그는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하루 동안 걸어온 만큼의 땅을 갖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발을 더 내딛던 농부는 저물녘이 돼서야 간신히 시간 안에 들어왔지만 결국 쓰러져 죽고 만다. 실제로 자신이 획득한 몫을 누릴 수 없었던 그에게 필요했던 땅은 딱 죽은 육신을 뉠 만한 그만큼뿐이었다는 것이 이야기의 마지막이다.  


본래 글의 주제는 한치 앞의 일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 욕심의 부질없음에 대한 경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 이 단편을 읽었던 필자는 엉뚱하게도 ‘그래, 죽은 사람이야 가로·세로 2m의 땅이면 충분하다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먹고사는 데는 좀더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산 사람에게는 도대체 얼마만 한 땅, 얼마만 한 공간이 필요한 것일까. 오래전 읽은 이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은 최근 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서울 종로구의 한 고시원 화재사건 때문이었다. 


이번 화재사건을 계기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시원에 거주하는 사람은 40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중 20%는 6.6㎡(2평)가 채 안되는 공간에서 살고 있다. 그보다는 크지만 1인가구 최저 주거기준 면적인 14㎡(약 4평)에 못 미치는 공간에서 사는 사람도 30%에 달한다. 고시원 거주자의 72%는 39세 이하에 월평균 소득이 약 181만원인 사람들이다. 고시원이 열악하긴 해도 비주택 거주지 가운데 맨 밑바닥은 아니다. 소득이 줄어 한달에 평균 134만원 이하로 벌게 되면 고시원에서조차 살 수 없어 여관방으로 옮겨가게 된다.


화재사건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고시원장과 건물주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고 한다. 물론 막힌 비상구 및 작동하지 않은 비상벨이나 스프링클러를 두고도 꼬박꼬박 월세를 받은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연 행정당국이나 사회가 고시원의 이런 현실을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서울과 주요 대도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시원이 많이 생겨났다.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눈에 보이는 빈곤지역이나 판잣집·비닐하우스 같은 비주택 거주지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고시원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후략)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농민신문, 2018년 11월 21일)


원문보기: https://www.nongmin.com/opinion/OPP/SWE/FRE/302412/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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