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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경] 일본 속 ‘자이니치’는 왜 민족 정체성을 고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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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10-10 11:22 조회33,1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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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지독히도 추웠던 겨울, 일본 오사카의 작은 선술집에서 왈칵 눈물을 쏟은 경험이 있다. 선한 얼굴의 여사장이 운영하는 그 집은 ‘조선적 자이니치’(朝鮮籍 在日, 일본에 사는 조선인) 2세들이 퇴근길에 잠시 쉬어가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재정난으로 몇 달째 월급도 없이 조선학교를 지키고 있는 이, 사업 때문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총련에서 일했던 경력으로 인해 한국 방문이 좌절된 이, 차별받으며 몇몇 직장을 전전하다 결국 식당을 하는 아버지를 돕기로 결정한 이. 각자의 경험은 달랐지만 모두 조선적이라는 ‘민족’을 부여잡고 사는 이들이었다.
  
세계화 시대의 ‘민족’이라니. 그게 도대체 뭐라고 세대를 이어가며 지켜내려고 그리 안간힘을 쓴단 말인가. 개인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요즘 같은 시대에 말이다. 조선적 자이니치는 일본에 머물지만, 그곳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남겨진 조선인 중 상당수는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을 거부하고 ‘조선적’으로 남을 것을 선택했다. 그들에게 조선 국적과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일본 사회의 차별을 견뎌내는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었다. 실제로 아베 신조 정부는 조선학교 고교 교육 무상화 지원 배제 등 차별을 하고 있고, 최근 오사카 고등재판소(고등법원)도 고교 무상화 차별 정책에 손을 들어 주는 판결을 했다.
  
이런 차별은 지금이라도 국적을 바꾸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 굳이 일본 사회에서 고립되는 험난한 삶을 선택한 자이니치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조선적을 유지하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술을 내오던 여사장이 강한 일본어 억양으로 대답했다. “그냥 내 민족이니까.” 
  
그들에게 민족은 분단된 남북이나 한민족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닌 그냥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족·이웃인 듯했다. 일본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 조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며 버텨온 친구들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조선인 출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감 등 뒤섞인 감정이 바로 이들이 말하는 민족 정체성이었다.
  
고백하자면 지금껏 필자는 민족은 폭력적이며 배타적인 호명(呼名)이라고 믿어왔다. 민족은 타자와의 구별 짓기를 통해 생산되는 집단 정체성이고 대부분의 경우 개인의 자유와 집단 간 차이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민족의 이름을 앞세운 수많은 폭력·전쟁·배제·갈등의 사례는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조선적 자이니치들의 삶이 말해주듯 쉽사리 민족을 폐기하기도 어렵다. 누군가는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겨우 삶을 유지하며, 무엇보다도 민족이라는 이름의 상상 공동체가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분단된 한반도에서 민족의 평화로운 공존은 부정할 수 없는 미래의 지향이자, 찢긴 민족이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의 근원적 모순이다. 한반도의 맥락에서 민족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지금껏 어떤 맥락에서 민족이 강조됐으며, 어떤 민족 정체성이 생산됐는지를 살핌으로써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민족의 자리를 고민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자이니치들이 일본 사회의 차별을 견뎌내기 위한 소수자의 정체성으로 민족을 호명했다면, 분단된 한반도에서 민족 정체성은 과거 원형 복원으로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남북 모두 온갖 사회문제를 봉합할 목적에서 규율적 정체성으로 민족을 강조해왔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이런 형태의 민족은 세계화 시대의 평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작금의 한반도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다. 원형으로서 민족을 소환했던 최근 남북 교류 이벤트가 시민들에게 예전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를 되새겨 봄 직하다. (후략)
    
김성경 북한대학원대 교수
(중앙일보, 2018년 10월 2일)

원문 보기: https://news.joins.com/article/230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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