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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13년만에 다시 가 본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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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9-27 09:26 조회33,1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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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소박한 7분 연설’ 절정의 지점에 이르렀다

 


“평양 시민들 활기차고 밝아져
문 대통령 소박한 언어의 연설
평범함의 위엄과 역사성 보여줘”

“백두산 함께 간 이재용 부회장
백낙청 교수에게 공손히 다가가
‘대1때 선생님 강의 들었습니다’ 인사해”

 


새벽 5시 반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2박3일 뒤 저녁 7시 무렵 성남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내 몸에 닿은 가장 구체적인 경험은 각종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다양한 소식들로부터의 차단이었다. 그것은 내 눈이 보고 내 귀에 들리는 것을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하는 원초적 단계로의 일시적 회귀였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비행시간은 채 한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들판은 잘 정비되어 보였고 우리 땅 어디나 그렇듯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물결로 한가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안내원에게 들으니, 북녘도 지난여름 폭염과 태풍에 시달렸는데, 그래도 올해는 벼농사가 풍년이란다.

순안공항에서의 대통령 환영행사는 간단했다. 나는 비행기 트랩에 선 채로 그 장면을 멀리 바라보았는데, 원경으로 보이는 김정은 위원장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자주 보았던 대로 당당하고 기운찬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지도자가 아니라 ‘인민’들이었다. 공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환호를 연발했지만, 평양 중심부까지 오는 동안 목격한 열렬한 환영은 나 같은 사람에게 어떤 ‘합리적’ 해석도 구차한 것으로 느끼도록 만들었다. 한반도기와 꽃장식의 거대한 파도 사이를 지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내 눈시울로 밀려오는 감동을 억제하며 나는 동승한 안내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인민들이 몇이나 거리로 나왔을까요?” 하지만 그는 쓸데없는 질문 말라는 듯 대꾸했다. “거 어케 셀 수 있갔습네까!”


2005년 7월 남북작가대회 참석차 와서 묵었던 고려호텔은 13년 전보다 내부가 더 단장된 것 같았다. 내게 배정된 20층 방에서 내다본 거리 풍경도 13년 전에 비해 훨씬 밝고 활기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는 우리 작가들이 방문의 주역이었기에 일정도 작가들 중심으로 짜였다. 반면에 이번에는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이 개인적 우의를 다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의 운명에 관해 논의하는 회담에 따라온 만큼 수행원들의 모든 일정은 정상회담의 진행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방에 앉아 쉬다가도 벨이 울리면 로비로 모이고 휴게실에서 환담을 나누다가도 버스 타라는 연락이 오면 달려가는 수가 많았는데,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당연히 예상할 수 없었다. 나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자격으로 왔기에 종교계나 시민사회 대표들과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많았다. 천주교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한 대표들의 일상생활을 내가 자세히 알 리 없지만, 곁에서 지켜본 느낌으로는 그분들은 이렇게 위에서 일방적으로 정해진 일정을 따르는 것을 그리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내게 떠오른 공상은 경제계 인사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것이었다. 많은 분들이 온 건 아니지만, 아무튼 유명짜한 대기업 회장·부회장들이 버스에 멍하니 앉아서 또는 명령을 기다리는 직원들의 보좌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마 거의 난생처음 또는 수십년 만에 처음 겪는 생소한 체험일 것이었다. 짓궂은 추측일지 모르나, 이 낯선 시간들은 늘 결정하고 지시하는 데만 익숙해온 그들에게 귀중한 자기성찰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돌아간 뒤 그들이 장차 남북의 경제협력사업에서 큰 역할을 맡을 것이 기대되지만, 그런 역할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도 오늘 겪어보는 ‘을’의 체험은 보약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장면은 백두산 이곳저곳에서 사진들을 찍는 가운데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백낙청 교수에게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대학 1학년 때 선생님께 교양영어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요.” 가까이 섰다가 우연히 듣게 된 나에게 그건 아주 흥미로운 추억담이었다. 어떤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우리 사회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사적 인연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인 셈이기 때문이었다.


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전갈을 누군가로부터 들으며, 그리고 회담 결과에 국내 언론과 미국 정계가 어떻게 반응할지 어렴풋이 추론하면서, 그러나 우리 수행원들은 때로는 모두 함께, 때로는 정계·경제계 인사들과 다른 팀을 이루어 각기 서너 군데를 방문했다. 내가 특히 감명을 받은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국가적 배려의 적극성과 치밀함이었다. 만경대소년궁전 곳곳에 게시된 “어린이를 왕으로 받드는 내 나라 정말 좋아라”라는 구호도 그렇지만, 교원대학에서 이 교실 저 교실 안내받으며 보았던 교육현장의 모습도 내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물론 잠깐 들른 외부자의 피상적 관찰에 불과하므로 남북 교육의 심층적 현실을 제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라의 미래가 교육에 달려 있음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이곳 교육현장을 지도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교원대학 안으로 들어서자 담벽에 붉은 글씨로 크게 적힌 구호도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자’였다. 남쪽에 사는 우리도, 아니 지구 어디에 살든 명심할 만한 원칙 아닌가. 버스로 시내를 달리면서 보니 이 구호는 다른 건물 벽에서도 가끔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점에서 북한은 일상생활의 전 과정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그리고 입시 스트레스와 학원폭력에 못 이긴 자살 학생 보도를 수시로 접해온 사람에게 이것은 아주 낯설면서도 눈물겨운 교훈이었다.


마지막날 오전 예정에 없던 백두산 등정은 13년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던 터라 내게는 감명이 덜했다. 새로운 것은 케이블카로 400미터를 내려가 천지 물에 손을 담가보고, 그리고 일어나 사방에 솟은 날카로운 백두산 연봉을 쳐다보며 숨을 들이쉬고 내쉰 것이었다. 그 심호흡은 사실 전날 밤 5·1경기장에서 보았던 그 형언할 길 없이 막강했던 장면을 내 나름으로 소화하기 위한 반추작용이었다. 1만7490명의 고급중학교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벌이는 카드섹션도 엄청난 것이었지만, 드넓은 운동장과 공중에서 펼쳐지는 수천명 대군중의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가령, 1200명의 예술가들이 운동장 가득히 앉아 연주하는 ‘가야금대병창’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체조·무용·교예·연주가 결합된 공연이 말할 수 없이 압도적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보는 내 가슴속에서는 그 집단성에 대한 저항의 습성도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엄청난 공연이 가능하기 위한 사회적 동원이 과연 정치적으로도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 한구석 꼼틀거렸던 것이다. (후략)

 

염무웅 문학평론가,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한겨레, 2018년 9월 21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63157.html#csidxd5c19e29acd66f4b6a81fb0d1094a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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