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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표절과 자비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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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10-21 22:07 조회31,2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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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이란 말이 있다. 타자의 발언을 해석할 때, 그가 충분히 일관성 있고 합리적이라고, 최소한 해석자 자신만큼 그렇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말은 타자를 비판하고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평가나 비판을 위해서도 해석 작업에서 자비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의 원칙에서 어긋난 쉬운 예로 북한 지도자 김정일이나 김정은을 향해 멍청하고 교활하다고 비난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멍청할 수도 있고 교활할 수도 있지만, 멍청하고 교활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은 해석자 자신의 비일관성과 비합리성을 드러낼 뿐이다. 이런 예도 들 수 있다. 몇달 전 중앙선관위는 비례대표를 대폭 늘리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정의당에 가장 유리했다. 그러므로 중앙선관위의 행동을 자비의 원칙에 입각해 해석하려면, 중앙선관위가 보수편향이라는 가설을 단순하게 고수하기 어렵다.


필자는 이런 자비의 원칙이 지난 몇달간 큰 논란이 된 신경숙의 표절 논란 그리고 함께 제기된 문학권력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표절이나 문학권력 문제를 제기한 쪽의 선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들의 발언 동기가 한국문학이 존경받을 만한 성과를 내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신경숙의 작품 전체가 형편없다는 견해는 신경숙 작품들에 대한 그간의 비평과 대중의 반응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명성을 얻었고 작품 수도 많은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신경숙 또한 걸작과 졸작을 모두 생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작가가 한두 작품의 몇몇 구절에서 표절로 판단할 만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점에 근거해 그의 작품 전체를 쓰레기라는 듯이 발언하기보다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석해봐야 한다. ‘상습적 표절’, 그러니까 도벽이 있다는 식으로 간단히 해석해 치우는 것은 자비의 원칙에 입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신경숙의 표절이 ‘의도적’ 표절은 아니라며 한사코 ‘감싼’ 백낙청에 대한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다. 백낙청이 비평가이자 문예지 편집인으로서 한국문학에 기여해온 바를 깡그리 부인하지 않는 한, 그의 신경숙에 대한 비평이 상업적 고려 때문이라고 주장하려면 그의 다른 비평들도 상업적 고려라는 가설에 입각할 때 잘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다고 할 수 없다.(후략)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15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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