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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갑우] ‘레솔베르’와 ‘고난의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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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10-06 15:32 조회31,9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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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쿠바를 방문했다.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전개된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에 맞서, 1986년부터 배급제도의 재제도화와 같은 사회주의적 기획을 강화하고 동시에 외자 유치와 수출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진입하려는, “오류와 부정적 경향을 교정하기 위한 캠페인”이란 쿠바정부의 정책이 내적 파열음을 낼 즈음이었다. 이 모순의 추동력은 태환가능한 국제통화의 부족이란 위기였다. 고르바초프는 방문 기간 동안 자신의 정책에 부정적 시선을 가진 쿠바공산당을 비판하지 않았고, 쿠바와 25년 동안이나 유효한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서면서 소련은 쿠바에 다음 해부터 무역거래에서 우호가격이 아닌 세계시장가격으로 국제통화로 결제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과 체제 전환을 시작한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에서는, 1987년경부터 쿠바에 대한 원조의 비효율성과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카스트로에 대한 비판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당시 식량수입의 약 63%, 연료수입의 약 98%를 소련에 의존하고 있던 쿠바에 소련의 정책전환은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사안이었다. 쿠바의 주요 수출품인 설탕과 니켈의 세계시장가격이 1980년대 초반부터 하락하고 있었고, 쿠바는 설탕을 소련의 원유와 교환하는 분업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1991년 말 소련의 붕괴는 사실상 쿠바경제를 섬멸했다. 고용을 인권으로 보고 ‘완전고용’을 국가 목표로 제시했던 쿠바공산당이, 1992년 공식적으로 실업의 존재를 발표할 정도였다.

안보위기도 함께 왔다. 1991년 9월 고르바초프는 쿠바 주둔 소련군 약 1만2000명의 철수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소련군의 쿠바 주둔은 소련의 강제보다는 쿠바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적대하는 미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상태에서, 쿠바영토 내에 관타나모 미군기지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이 붕괴하면서 쿠바는 군사 장비의 보수와 수입을 위해서도 현찰이 필요했다. 쿠바군이 관광업, 수송업 등에 진출하여 외화벌이를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국발 위협이 증가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의 무력화로, 쿠바인이 느끼는 ‘피포위 심리’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카스트로는 1989년 말부터, 평화시대의 ‘특별시기(special period)’를 언급했다. “사회주의 아니면 죽음을”은 카스트로의 말이었다. ‘해결한다’라는 의미의 ‘레솔베르(resolver)’는 이 위기를 돌파하려는 구호였다. ‘제3세계 초강대국’ 쿠바가 생존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표현들이었다. 특별시기가 시작된 1990년, 미국은 쿠바에 송출하는 선전방송인 ‘마르티’를 시작했다. 쿠바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리고 1992년 10월 미국은 ‘쿠바 민주화법’을 제정하고 쿠바의 이른바 ‘민주적 이행’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쿠바에 대한 금수와 쿠바 내 반정부 세력의 지원이 주요 사업이었다. 1994년 수도 아바나에서 소요가 발생하자 쿠바정부는 주민들이 보트를 이용해 미국으로 ‘탈쿠바’하는 것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1996년 2월 쿠바영공을 침범한 미국 경비행기를 쿠바군이 격추한 이후, 미국 상원은 보다 강화된 제재를 담은 ‘헬름스-버튼법’(Helms-Burton Act)을 통과시켰다. (후략)


구갑우 북한대학원대 교수·정치학

(경향신문, 2015년 10월 4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42051545&code=9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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