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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입증책임과 복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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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3-12 15:11 조회16,7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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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기사를 하다 보면, 택시비를 내지 않고 내리는 손님이 있어요. 그런데 손님 쫓아가서 택시비 내라고 하면 손님은 자기가 택시비를 내지 않은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삼성 백혈병 피해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극 중의 아버지는 마지막 변론에서 억울함을 이렇게 호소한다. 같은 공장에서 비슷한 병을 얻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충분히 공정의 유해성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죽은 딸의 산업재해 여부를 피해자 쪽에서 입증하라니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애초에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정신이라는 것이 노동자의 업무상 재해를 넓게 인정하여 신속하게 보상하는 대신 고용주에게는 고의와 과실 유무를 묻지 않는 무과실책임주의 아니었던가? 더구나 미국 아이비엠(IBM)의 사례에서 보듯 이미 외국에서는 백혈병을 비롯한 희귀암들이 반도체 산업 관련 산재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작업장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틀어쥔 회사가 아닌 개개의 피해자들이 입증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불공정한 게임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것이 영화 속의 노무사가 삼성뿐 아니라 산재보상보험을 운영하는 근로복지공단의 책임도 크다고 지적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에게 입증책임을 지우고 그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한 고통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현상은 비단 산재 문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현상이라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세상사라는 것이 증거가 확실한데도 힘에 밀려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지만, 증거를 대기 어려운 시비일수록 입증해야 하는 쪽이 불리한 법이 아닌가. 따라서 사안마다 입증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데, 과연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최근 세상을 등진 세 모녀의 죽음을 놓고 수급권만 신청했으면 되었을 텐데 안타깝다, 아니다, 신청했어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논란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그 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서류와 심사를 통해서 입증을 했어야 하리라는 점이다. 노숙자에게도 지원을 위해서 주소지를 요구한다고 하니 실제 형편이 어떻든 서류로 입증하고 관료적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복지혜택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삼성 백혈병의 경우에도 근무하는 도중에 얻은 병도 산재 입증이 어려운데 한때 근무했던 하청노동자는 병을 얻은들 어디에서 무슨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서는 부족한 공무원의 수를 늘려야 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늘린들 복잡한 입증 절차에 관련된 서류를 심사하고 자격을 감시하는 일에 투입된다면 실질적인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절차가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혜택이 긴급히 필요한 사람에게는 벽이 높아지고, 제도의 허점을 고의로 노리는 사람은 막아내지 못하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반발과 납세자들의 반감만 키울 가능성도 크다.

그러니 어려운 싸움 끝에 산재 인정을 받아낸 아버지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고, 길에서 넘어진 끝에 세상까지 버리게 된 세 모녀의 사연에 가슴 아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입증책임의 변경이나 복지의 확대 수준에서 논의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종일 일을 해도 생계에 충분한 임금을 받을 수 없고, 일터에서는 끝없이 환자가 생겨나는 문제를 그대로 두고 복지사회를 이룬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사실 애초에 입증책임의 문제 자체가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산물이라고 할 때, 이를 두고 절차만 개선하고자 한다면 실제 그조차도 이루어내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삼성 백혈병을 둘러싼 지루한 법정 공방이 바로 그 사례가 아니겠는가.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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