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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비정상의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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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08 17:23 조회17,1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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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 핵심어 가운데 하나는 “비정상의 정상화”였다. 근대 사회과학사에서 가장 말썽 많은 개념 가운데 하나인 정상/비정상이 왜 한국 정치 안으로 진입하는 비정상적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정상(normality)은 규범(norm)에서 온 말이라 ‘옳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의학적 용어법을 경유해서 사회 진단 개념이 되자 규범보다 강력하고 끔찍한 것이 되었다. “걔, 비정상이야”와 “걔가 잘못했어”라는 말을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상의 의미는 반대 방향으로도 발전했다. 근대사회가 된다는 것은 당연시된 규범적 기준이 약화됨을 뜻한다. 그래서 규범적 전제가 필요하지 않은 기준으로 수용된 것이 통계학적 평균이었다. 이 경우 정상 개념은 규범과의 연계를 상실한다. 예컨대 어떤 사회에서 20여년간 살인이 연평균 1000건 발생했는데 올해 1050건 발생했다면, 올해의 살인 발생은 ‘정상’인 것이다. 비정상은 단지 평균으로부터의 과도한 이탈, 그러니까 1300건으로 증가하거나 700건으로 감소할 때 쓸 수 있는 말이 된다.


이렇게 정상 개념이 더 강한 규범화와 탈규범화 모두를 함축함에 따라 비정상 규정은 도덕적 비판을 상회하는 폭력적 규정이 될 수 있는 동시에 평균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서술적인 의미를 띨 수 있게 된다. 후자의 의미로 말한다면, 평균 수준의 범죄나 부패는 상식과 달리 그 사회의 ‘정상적’ 특징이다. 이렇게 사용된 정상/비정상은 사회 운영을 조절하는 기준 개념이 되긴 해도 특정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기준은 못 된다. 이에 비해 전자의 의미로 말한다면, 범죄나 부패는 형법적 과정의 대상을 넘어서서 제거되거나 축출되거나 박멸되어야 하는 사회적 질병으로 인식된다.


박 대통령이 정상/비정상 도식을 수용할 때, 두 가지 의미론 중 무엇에 끌렸을지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박 대통령이 각종 비리와 범죄 그리고 부패를 비정상의 예로 열거해나갈 때, 정상 개념은 직관적으로 규범의 강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의미로 수용된 정상 개념이 수행하는 정치적 기능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두 가지 기능을 하는 것 같다. 하나는 동지/적의 구별에 근거한 정치를 대치하는 것이다. 2013년 우리 사회를 흔들었던 정치적 갈등의 한 축은 엔엘엘(NLL) 문제와 이석기 그룹의 내란음모 사건이었다. 여기서 동원된 정치 개념은 남한 사회 내부를 일종의 내전 상황으로 규정하는 적과 동지의 모델이다. 국정원의 “심리전”이라는 표현과 활동 내용이 함축하는 바는 이런 모델과 정확히 상응한다. 하지만 이 모델에는 적과 동지 가운데 어느 한쪽에 규범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정상/비정상은 이런 ‘약점’을 정정한다. 즉, 적/동지의 구별에 함축된 적대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자기편에 규범적 우위를 마련해준다.

다른 하나는 정치의 초점을 정당성(legitimacy)이라는 근본 개념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이다. 민주적 법치국가는 정당한 절차에 의한 권력 창출과 정당한 것으로 수용된 법에 입각한 권력 행사에 의해 유지된다. 대통령은 공정한 선거에 의해서 선출되어야 하며, 공약은 지켜야 하고, 체포영장으로 압수와 수색을 실시할 수는 없으며, 학교 성원들이 갈등을 겪더라도 교과서를 채택하는 과정에 특별감찰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당성에 입각한 법치에서는 정상/비정상이라는 도식은 불필요하다. 원전 부품 비리는 불법적이며 그것에 입각해 엄중하게 처벌하면 되지 그것에 비정상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덧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불필요하고 위험한 말인 셈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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