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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두 개의 국민을 위한 하나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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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08 15:42 조회17,1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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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 해가 저문다. 지난해 이맘때 적잖은 국민들이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에 실망하여 어떤 사람은 방 안에 처박히고 어떤 사람은 산으로 향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2013년을 맞는 기분이 그리 암담하지 않았다. 그 이전 5년 동안이 워낙 끔찍했기에 그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당의 필패가 한때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던 것도 기억에 새롭다. 집권당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당명까지 바꾼 게 뭘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다. 게다가 박근혜의 선거공약은 이른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간에 어느 정도 균형을 추구할 듯이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같은 당 출신으로 대통령이 바뀌는데도 거의 정권교체처럼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박근혜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는 걸 실감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1년 내내 나라를 시끄럽게 한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문제는 이전 정권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박 대통령으로서는 취임 초기에 엄정한 수사를 검찰에 지시하면 되는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정부는 온갖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사태를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갔고, 그럼으로써 박근혜 자신이 선거부정에 관여했거나 최소한 그 덕으로 당선을 거머쥐었다는 의혹을 자초했다.

형식적 측면에서 이처럼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내용적 측면에서도 박근혜 정부는 선거공약의 핵심적 요소들을 차례로 내던졌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경제민주화’는 이제 말 자체가 정부의 시야를 떠났고 각종 복지정책들도 껍데기만 남은 꼴이 되었다. 남북관계 역시 정체상태에 빠져, ‘신뢰 프로세스’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조차 쑥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집권 첫해를 이렇게 소득 없이 보낸 대통령에게, 그가 진정 무엇 하려 대통령이 되려고 했는지 묻는 것은 국민의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된다는 목적만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마키아벨리스트라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당면의 최대 현안인 철도노조 파업 사태도 이런 상호불신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박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성찰적 자의식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관한 고정관념의 철옹성에 갇혀, 실제로는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타산적 정치행태를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자신을 강인한 원칙주의자라고 확신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든다. 아마 박근혜 대통령의 놀라운 성공요인이자 그의 정치적 탁월성은 다수 국민들에게도 자신의 그러한 확신을 주입시킬 수 있었던 것, 곧 자신을 소신과 원칙의 정치인으로 포장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가령, 박 대통령은 정부와 노조의 대치가 고비를 향해 치닫고 있던 지난 23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어려운 때일수록 원칙을 지키고 모든 문제를 국민 중심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말인즉 그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원칙인 것을 다른 사람은 편협한 독선주의로 볼 수도 있다는 데 대한 고려는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27일 밤 9시 <제이티비시> 뉴스 시간에 환노위(환경노동위원회) 여당 간사 김성태 의원은 손석희 앵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노사 중재가 불발로 끝났지만 중재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야밤에 면허 발급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대답했는데, 미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수서발 케이티엑스(KTX) 면허 발급’이라는 자막이 화면에 떴던 것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원칙’의 작동범위가 국민 일반에게는 물론이고 국회의 여당 간사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제한된 것이었음이 생생하게 입증되는 현장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기득권 체제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선이 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국가를 ‘두 개의 국민’으로 분할하고 있다. 그리고 두 진영 간에는 공공연하게 또는 잠재적 형태로 목숨을 건 생존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 우리의 비극은 정부가 조정자의 역할을 버리고 기득권층의 집행기구로 전락한 데 있다. 또 이런 말로 한 해를 마감하는 것이 가슴에 쓰리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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