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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냉전시대의 시작과 끝에 섰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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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9-30 13:38 조회17,6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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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에 희생된 우리의 운명

  최근 번역된 두 권의 책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20세기 세계사를 움직인 두 거대국가의 정치와 외교정책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관찰할 수 있는 개념을 제시한다. 하나는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Frost Kennan, 1904~2005)의 문집『미국 외교 50년』(유강은 옮김, 가람기획 2013)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 정치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의 자서전 『선택』(이기동 옮김, 프리뷰 2013)이다.

  물론 케넌과 고르바초프는 한 세대의 나이 차이가 날뿐더러 세계정치에서 차지했던 그들의 역할과 위상에도 엄청난 격차가 있다. 무엇보다 두 책은 성격이 아주 다르다. 케넌의 책은 엄밀한 학술서는 아니지만 강연이라는 자유로운 형식에 의탁하여 미국 외교정책의 역사를 그 나름의 시각으로 개관한 일종의 논술서임에 비해, 고르바초프의 책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감상을 중심으로 서술한 자서전이다. 그런 점에서 두 책은 단순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케넌과 고르바초프는 수많은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핵심적인 연결고리로 이어진 존재들이다. 그것은 바로 냉전이라는 고리이다. 케넌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소간에 냉전이 형성될 무렵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을 구상하는 데 관여한 외교관으로서, 책에 서문을 쓴 존 J. 마이샤이머의 표현대로 “냉전 초창기의 핵심적인 정책입안자”였다. 반면에 고르바초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냉전의 해체에 주도적으로 기여한 정치가이다. 냉전시대의 첫번째 전쟁 때문에 끔찍한 수난을 겪었고 아직도 그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냉전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핵심 당사자 자신들의 육성을 통해 그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 또, 중심국가 정책입안자들의 머릿속 구상이 현실 속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고 그런 것들이 약소민족의 운명에 때로는 어떤 치명타를 가하는지 숙고해보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과제이다.

  봉쇄정책의 탄생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그가 국무부를 떠난 직후인 1951년 시카고 대학에서 행한 6차례의 연속 강연인데, 이 책의 몸통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제2부는 1947년 7월 및 1951년 4월『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이며, 제3부는 그로부터 적잖은 세월이 지난 1984년 그리넬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이다. 이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냉전사(冷戰史)를 논의하는 사람마다 으레 첫머리에 거론하는 1947년의 글이다. 이 글이 나오게 된 배경부터가 흥미롭다.

  케넌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26년 국무부 직원으로 들어가 독일과 소련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 근무하면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통치를 현지에서 지켜보았고 세계대전의 발발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라 “미국 대외정책에 관해 중요하면서도 원대한 질문을 던지는 재능을 지닌 일류 전략사상가”였다. 세계사적 사건들의 현장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미국이 하나의 민주주의 국가로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식별하는” 일이었다.(『미국 외교 50년』 p.7, 미어샤이머의 서문)

  그가 모스크바에 근무하던 전후시기에 미국인들은 전쟁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이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은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1946년 2월 소련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를 절감한 본국으로부터 소련의 최근 행동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왔고, 그는 ‘긴 전문’을 보내 이에 답했다. 이 전문의 내용은 유명한 ‘트루만 독트린’(1947.3)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데, 이듬해 그가 이 전문을 정리하여 ‘X’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것이 이 책 제7장에 실린「소련 행동의 원천」이다.

  케넌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소련 권력의 작동방식은 다음의 세 가지 원리를 따르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본질적인 적대가 존재하며, 양자 간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 세계가 추구하는 목표는 언제나 소비에트 정권에 대립하며, 때때로 소련 정부가 정반대 내용의 문서에 서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술적 책략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이론에는 자본주의를 몰락시키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미국 외교 50년』p.261, 이하 <같은 책>으로 표시) 둘째, 소비에트 권력에서는 이론상 당 지도부가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므로 당은 언제나 옳으며, 따라서 철의 규율이 지켜져야 한다. 셋째, 진리는 불변의 상수가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역사의 논리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지혜가 가장 최근에 표명된 것일 뿐이다. 소련 권력의 이러한 작동방식을 고려할 때 “미국은 정당한 확신을 가지고 확고한 봉쇄정책으로 나가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 봉쇄정책은 소련이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려고 나서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예외 없이 반격에 직면하도록 완벽하게 설계되어야 한다.(같은 책 p.277)

  소련의 진정한 변화는 소련 내부에서

  공산주의 이론과 소비에트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케넌의 이해는 사실 피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고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전략가로서이다.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을 주장하는데, 케넌이 보기에는 소비에트 권력이야말로 자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라는 모순에 대하여 논하지만, 케넌이 파악한 바로는 오히려 소련에서는 금속과 기계 같은 몇몇 부문만 급속히 발전했고 나머지 산업은 극도로 낙후해 있다. 그가 보기에 공포와 강제 아래서 일하는 지친 국민들로서는 이런 결함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알기 어렵다. 케넌이 소련에 관해 지적한 것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권력이양의 절차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레닌에게서 최고 지위를 물려받은 것이 유일한 사례인데, 이 권력계승이 공고화되기까지 12년이 걸렸고 그나마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소련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소련 행동의 원천」보다 4년 뒤에 발표된 논문「소련의 미래와 미국」은 이에 대한 진지한 답변의 모색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냉전 형성기 소련에 대한 케넌의 입장은 매우 강경한 봉쇄정책이었다. 그러나 그는 군사주의적 해결책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소련의 바람직한 변화 가능성을 전쟁이냐 평화냐의 문제로 치환하는 데 단연코 반대한다. 6·25전쟁 시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을 그는 비판했다. 그는 제정 러시아와 공산주의 소련 사이의 사회경제적 연속성에 주목하여 소련의 현재 상황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인정했다. 따라서 앞으로도 소련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등장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단언한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소련체제의 붕괴 가능성을 암시하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소련 바깥에 있는 외부인으로서 ‘유리창을 통해 막연하게’ 소련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전제로 말한다. 어떻든 우리는 케넌의 이 글이 소련해체 거의 40년 전에, 즉 소련의 최전성기에 씌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는데, 소련의 해체가 내부적 변화의 결과로 나타날 것임을 내다본 다음의 문장에서는 더욱 놀라게 된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다음과 같다. 주로 외국의 고무나 조언을 통해 소련 정부의 이념과 실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진정하고 지속적이며 다른 나라 국민들의 환영을 받는 것이 되려면 그것은 소련인들 스스로의 구상과 노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외국의 선전·선동으로 한 나라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역사의 움직임을 천박하게 이해한 결과이다.(같은 책 p.318)

  케넌이 생각하는 한국전쟁의 기원

  그런데 우리가 케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단지 대소 봉쇄정책의 입안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트루만 행정부 시대에 주 소련, 주 유고슬라비아 대사로 잠깐 재직한 것을 제외하면 고위직에 있어본 적이 없다. 한반도 정책에도 관여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책에서 한국 내지 한반도의 운명에 관련된 언급을 도처에서 하고 있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우리 역사와 현실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어 우리의 심기를 건드린다. 그가 한국에 대해 고의적인 편견을 가졌을 리 없음이 분명하다면 그의 세계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몸통에 해당하는 시카고대학 연속강연에서 그는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인의 시각에서 세계정세를 돌아보고 있다. 그가 처음부터 전제하는 것은 이 반세기 동안에 미국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미국의 안보가 의존하는 몇 가지 근본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 중 결정적인 것은 “역사의 많은 시기에 걸쳐 우리의 안보가 영국의 위치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같은 책 p.80)는 데서 드러나는 미-영 공동운명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유럽대륙의 단일 지상강국이 유라시아 땅덩어리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 즉 유럽대륙의 세력균형은 안보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에서는 오직 소련만이 압도적 강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역할을 맡은 나라는 일본이다. 그는 1900년 전후의 시기부터 “아시아대륙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좌절시키려는 쪽으로 점차 옮겨간 정책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한”(같은 책 p.156) 전문가들의 견해에 동조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문제 전문가인 외교관 존 맥머리(John V.A. MacMurray, 1881~1960)가 1935년에 쓴 다음의 비망록을 경탄의 마음으로 인용한다.

  일본이 패배한다 해도 극동문제에서 일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중략) 일본이 제거되더라도 새로운 골칫거리들이 생겨날 테고, 동양의 정복을 꿈꾸는 (일본만큼 파렴치하고 위험한) 경쟁자로서 일본 대신 제정러시아의 계승자인 소련이 등장할 것이다. (같은 책 p. 157~8)

  맥머리의 예언이 있은 지 10년 뒤에 일본이 실제로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미국은 “일본이 반세기 가까이 한반도-만주 지역에서 맞닥뜨리고 떠맡은 문제와 책임을 물려받게”(같은 책 p.158) 되었다고 케넌은 말한다. 1951년의 강연에서 표명된 이 견해는 1984년의 강연에서도 되풀이되는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경험한 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점에는 근본적인 진전이 없다. 여전히 그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몰아낸 것이 소련을 불러들였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강대국 중심주의에서 나온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우리의 뼈저린 반성을 촉구한다.

  일본이 언제까지나 미국 군사력의 요새로 남고, 일본에 대한 평화적 해결이 합의되지 않으며, 모스크바가 일본의 상황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모스크바는 보상의 형태로 한국에서 군사-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한국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이 한국전쟁의 기원이었습니다.(같은 책 p. 335~6)

  스탈린 시대의 상처를 지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아시아에서 영국·프랑스·독일·중국·일본 등 전통강국들이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기진맥진 녹초가 되고 오직 사회주의 소련만이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하는 듯한 형국에서 미국이 엄중한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소련 자신의 내부적 상황은 실제로는 어떠했던가. 고르바초프의 자서전『선택』에서 내가 예의 주목해서 읽은 것은 그런 부분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카프카스 산맥이 멀지 않은 러시아 남부 스타브로폴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자신도 소년시절 트랙터 조수로 열심히 일해서 노동훈장까지 받았고, 정치가로 출세한 다음에도 농업전문가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그가 성장기에 처음 경험한 것은 농촌의 가난이었고, 다음에는 스탈린 통치의 폭력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전쟁의 참상이었다. 1933년에는 끔찍한 기근으로 식량이 떨어져 겨울 동안 아이들 세 명이 굶어죽었고 봄이 와도 땅에 뿌릴 씨앗이 없었다고 한다. 1937년에는 외할아버지가 억울하게 트로츠키파로 몰려 14개월이나 모진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외할아버지는 재판도 없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다행히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체포되고 외할머니 바실리사가 우리한테 와서 같이 지내게 되면서 우리 집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웃들이 발길을 끊었고,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도 한밤중에 몰래 왔다. 우리 집은 ‘인민의 적이 사는 집’이라는 낙인이 찍혀 격리됐다. 그 기억은 나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상처로 남았다.(『선택』 p.24. 이하 <같은 책>으로 표시)

  고르바초프가 열 살 때 전쟁이 났다. 독일군은 잠시지만 그의 마을까지 밀어닥쳤다. 1921~22년생인 청년들은 모두 징집되었는데, 그들 중 겨우 5% 정도만 살아남았다. 전시하의 궁핍은 하루하루 배를 채우기도 어려운 절박함으로 다가왔다. 그의 아버지는 적령기를 넘긴 나이였으나 결국 징집되었고, 용케 살아 돌아왔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나는 열네 살이었다. 전후 마을의 황폐한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집이라고는 진흙으로 지은 오두막뿐이고, 황량하고 빈곤에 찌든 정경이 사방에 가득했다. 우리는 전쟁의 아이들 세대이다. 전쟁은 우리의 성격과 세계관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같은 책, p.34)

  그의 반전사상의 뿌리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국립대에 입학했다. 법학부였다. 변방의 농촌 출신에게 면접도 필기시험도 없이 입학허가가 주어진 것은 ‘농민 노동자’라는 배경이 주효한 탓인데, 그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미덕이었다. 대학의 지적 풍토는 그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저서『소련공산당사』를 최고의 과학적 사상으로 추앙하는 강압적 현실과 숙청의 파도는 학문적 열정에 제동을 걸었다. 러시아에는 문학과 예술의 위대한 전통이 있고 그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작가들도 많았지만, 스탈린 시대의 대학생들은 그런 것들을 제대로 접할 수 없었다. 후일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탄식한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하지만, 나 역시 돌이켜 생각하면 학창시절에 이런 책들을 읽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우리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공허한 삶을 살았다. 공식 이데올로기가 떠넣어주는 한줌의 양식만 받아먹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비교해보고, 다양한 철학적 사상을 접하며, 스스로 옳은 것을 선택할 기회를 온전히 박탈당한 채 살았다. (같은 책, p.306)

  미국과 더불어 세계정치를 양분하는 거대국가의 화려한 외피를 벗겨내면 그 안에는 이런 정신적 공허가 들어 있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그 속에서 젊음은 자라나게 마련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레닌의 저작을 탐독했고, 독서를 통해 레닌 철학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도 그런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레닌은 자기 책에 반대파의 입장도 자유롭게 서술해놓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레닌을 통해 반대의 논리를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학생들이 레닌의 『소련공산당 약사』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스탈린 시대의 자기정체성을 고르바초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스탈린 정권은 농부들을 농노처럼 취급했다. 기존질서가 정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도시 출신보다 농촌 출신 쪽에 더 많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집단화’나 ‘집단농장 시스템’은 도시 학생들과 달리 내게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중략) 나는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스탈린 통치 하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체제는 아니었고 ‘수정주의자’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회복되기를 원했다.(같은 책, p.51~53)

  소련 관료체제 안에서의 성공과 관료제 비판

  스탈린 시대가 끝날 무렵 고르바초프는 결혼을 하고 대학을 마친 뒤 고향 스타브로폴로 내려와 당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때마침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이 소련역사와 세계정치에 엄청난 파장을 몰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소비에트 시스템을 본질적으로 부정하고 변화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고르바초프는 흐루쇼프가 한편으로 “역사의 흐름에 맞서는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주었지만, 다른 한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현상의 밑바닥에 있는 근본원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보기에 흐루쇼프는 당을 현대화하고 당의 독점적 권력을 축소시키려는 옳은 방향을 취했으나, 이 과정에서 기득권세력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고, 그 때문에 결국 물러나게 된 것이었다. 흐루쇼프의 실패를 서술하면서 고르바초프는 27년 뒤 자신이 맞이한 운명을 돌아보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공산주의 권력의 —또는 권력 일반의— 작동 메카니즘에 대한 쓰디쓴 희화화이다.

  이 이야기를 쓰다 보니, 우리도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흐루쇼프의 경험을 좀더 참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1964년 ‘궁정 쿠데타’를 통해 흐루쇼프를 실각시킨 것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은 넘쳐날 정도로 많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당시 그를 몰아낸 장군과 관료들이 ‘인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욕심에서였다. 소련공산당 중앙위는 1957년에 흐루쇼프가 ‘반당 그룹’에 도전할 때 그를 지지했다.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바로 이 그룹의 손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같은 책, p.93~94)

  흐루쇼프가 쫓겨나던 그해 고르바초프는 지방당 조직부장이 되었고 1970년에는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다시 8년 뒤에는 공산당 중앙위 농업담당 서기가 되어 거의 4반세기 만에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 시대의 억압과 침체,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짧은 과도기를 거쳐 1985년 그 자신이 당과 국가의 최고지위에 올랐다. 여러 복합적 요인의 도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소련 같은 경직된 관료세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록적인 출세속도였다. 생각해보면 그의 이런 세속적 성공과 소련 관료제도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 사이에는 쉽게 해명되지 않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비근한 예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고르바초프는 드문 애처가였다. 혈액암으로 먼저 떠난 부인 라이사 여사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고백으로 자서전을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중간중간에도 그는 부인과의 정다웠던 시절을 끊임없이 회상한다. 그는 공산국가의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부인을 대동하고 외교석상에 나타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편이 모스크바 정계의 고위직에 오른 뒤 라이사는 부인들끼리 모이는 특수집단에 섞이는 것을 힘들어하고 고위직 부인들 중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부인들끼리의 관계는 그들의 남편 지위를 그대로 반영했다. 수다스러웠던 부인들 모임에 몇 번 참석하고 나서 라이사는 거만함과 천박함, 아첨이 뒤섞인 모임의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다.”(같은 책, p.159) 라이사가 경험한 이 천박함은 공산주의 이념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위계조직의 타락상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더 특징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품의 라이사와 평생에 걸쳐 깊은 친밀성을 유지한 ‘따뜻한 남자’ 고르바초프가 무슨 수로 그 냉혹한 관료조직의 정상까지 올라갔느냐이다. 두고두고 풀어볼 문제이다.

  수평선 너머에서 보았다고 믿은 것

  『선택』이 일종의 자서전인 만큼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선택에 대한 합리화가 바탕에 깔리는 것은 어느 면에서 불가피하다. 매순간 그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합리적 노선을 따르고자 애쓰는 것은 본인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역사적 합리성이라든지 객관적 정의 같은 보편적 기준에 비추어 어떤 평가를 받을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알다시피 고르바초프는 최고위직에 오른 다음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깃발 아래 소련정치와 사회를 대담하게 개혁하는 정책을 밀고나갔다. 그것은 스탈린과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적 인식이 바탕에 있었다.

    브레즈네프 시대를 평가하는 핵심 키워드는 브레즈네프의 지도력이 시대적 요구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도그마와 사고에 얽매여 과학기술과 사람들의 삶과 행동에, 그리고 국가와 사회, 지구촌 전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소련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갇혀 시대에 뒤처지고, 심각한 사회적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같은 책, p.198)

  그러나 그가 사회주의를 부인하거나 자본주의에 투항하려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꿈꾼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가 주관적으로 목표한 것은 투명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소련을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국가로 살려내는 것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때와 같은 목표, 다시 말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사회주의를 위해 싸울 것이다. 나는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사회주의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생각이 그러했고, 안드로포프와 이야기하면서 ‘더 많은 민주주의’가 ‘더 나은 사회주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은 한층 더 확고해졌다.(같은 책, p.286)

  이 목표를 이루자면 냉전종식은 필수였다. 미국과의 군비경쟁으로 경제적 압박이 목을 죄는 터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사회적 질곡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미 서기장으로 선출되기 전인 1984년 영국 방문 시에 의회연설을 통해 냉전의 종식을 주장하고 핵을 포함한 무기의 감축과 제한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지구뿐이다. 유럽은 우리가 사는 공동의 집이다. 유럽은 ‘군사작전을 하는 전장’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집이다.”(같은 책, p.244) 연설의 이 대목은 당시 언론에 특히 많이 보도되었다.

  이후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힘든 줄다리기를 되풀이했다. 그 가운데 한번,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의 협상이 성과 없이 끝나고 고르바초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수백 명의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인류 전체가 내 앞에 일어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는 입을 열었다. “이것이 실패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돌파구이다. 처음으로 우리는 수평선 너머를 보았다.”(같은 책, p.330) 우여곡절 끝에 냉전은 종식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평선 너머에 있다고 믿은 것이 냉전의 종식만은 아니었다. 진정한 평화가 아님도 그 후의 현실은 입증했다. 죽음 같은 경쟁과 무덤보다 암울한 삶이 오늘 대다수 인류의 것이 아닌가. 고르바초프의 이상주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한갓 백일몽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13.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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