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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원전 재가동, 자연상태, 민주주의의 갱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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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7-06 10:24 조회28,3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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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재가동, 자연상태, 민주주의의 갱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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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반원전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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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2일, 일본 수상관저 앞에 4만5천명의 시민이 모였다. 약 1주일 전인 6월16일, 정부가 후쿠야마(福山)현 소재 간사이(関西) 전력 오오이(大飯) 원전 3, 4호기 재가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은 지난 5월5일 50기의 원전 모두가 가동 중지된 이래 약 한달여만에 원전을 재가동하기로 한 것으로, 이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마다 개최되던 원전 재가동 반대 시위에 이례적으로 4만5천명(주최측 추산, 경찰 추산 1만5천명)이 모인 것이다. 전국에서 정기적으로, 혹은 산발적으로 개최되던 원전 재가동 반대 시위 보도에 소극적이었던 메이져 보도기관도 이번만큼은 비중 있게 집회/시위를 다뤘다. 아사이, 마이니치, 닛케이, 산케이, 요미우리 등 주요 일간지가 크게 지면을 할애했고, NHK 및 주요 민방의 보도 프로그램이 이 시위를 생중계하거나 자세한 해설을 곁들여 방송했다. 지난 해 3월 이래 원전 문제를 다룬 기사나 프로그램은 끊이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반원전 운동이 이렇게 비중 있게 다뤄진 것은 지난 해 상반기 이래 처음 있는 일로, 일본 사회의 원전 재가동을 둘러싼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가늠할 수 있다. 소비세 문제 등 매끄럽지 못할 뿐 아니라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노다 정권이 치명적인 무리수를 둔 셈이다.

물론 이 결정이 장고 끝의 무리수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른 감이 있다. 벌써부터 일본 내에서는 여러 반민주적 의사결정과 반시민적 정책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재계와 관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원전 재가동 결정을 통해 정면 돌파하려는 정권의 노림수라는 분석이 등장하고 있다. 즉 시민의 외면을 받더라도 재계와 관료의 탄탄한 지지를 통해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꼼수’라는 것이다. 과연 노다 정권의 이번 결정이 시민의 외면과 저항으로 치명타가 될지, 아니면 재계와 관료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반시민적 권위주의에 기반한 정권 운영의 기초가 될지 과문한 탓에 쉽게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서글플 정도로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일본이란 국가에서 정권의 위기 타개책이 언제나 시민 주도의 거리 민주주의를 억제하고 외면할 수 있는 재계와 관료에 의존한 권위주의로 방향타를 잡아왔다는 사실이다. 1960년의 안보투쟁 때가 그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터진 각종 정치 게이트를 해결할 때도 그랬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930년대의 과격파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문민’ 정권이 기댄 것은 언제나 재계와 관료들이었다. 다소 과격하게 정리해보면 메이지 이래 일본 정권은 시민들이 아무리 거리에 나와 ‘자연상태’를 창출하여 국가권력을 소환하여 규탄하더라도, 언제나 자본과 통치권력의 확고한 지배체제에 기생하여 스스로를 연명시켜 온 것이다.

이번 노다 정권의 원전 재가동 결정이 과연 정권 유지에 성공할 것인지 어떤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사실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라는 인류 차원의 대재앙까지도 근대 일본의 통치 문법 속으로 환원해버리는 위기 불감증이다. 일찍이 독일의 공법학자이자 마성의 사상가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근대적 권력관계의 특징을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인간인 homo homini homo’ 관계라 설파했다. 권력관계가 한 인간(집단)의 다른 인간(집단)에 대한 지배와 복종 관계라 할 때, 근대적 권력관계는 신으로부터 위임받아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신성한 것이라거나, 늑대와 토끼처럼 물리적으로 뒤집을 수 없는 태생적이고 자연적인 것인 아니라, 언제든 지배와 복종의 주체와 객체가 뒤바뀔 수 있는 위태로움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적 권력관계는 소요, 내전, 반란, 혁명의 위험에 이미 언제나 노출되어 있는 것이며,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와 국가의 식별불가능성이란 바로 이 위험이 국가가 통치하는 시공간에서 항존함을 뜻했다. 즉 그것이 쿠데타이든 혁명이든 근대적 권력관계는 전복될 수 있는 위태로운 잠재력을 언제나 내포하며, 그런 까닭에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고 혁명으로 치닫지 않도록 타협을 거듭하는 것이 근대적 정치의 요체이다. 근대적 민주주의란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시민의식이 아니라, 바로 이 생생한 위기 의식과 이에 기반한 힘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셈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건강성은 그 위험성을 얼마나 직시하는지에 달렸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적 칼 슈미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고 말이다.

일찍이 마루야마 마사오는 1960년 안보투쟁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자연상태로부터 생각한다. 자연상태의 생생한 폭력 속에서 제도의 생명력이 생긴다”고. 홉스와 칼 슈미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서 스스로의 정치적 사유를 발전시킨 마루야마는 근대 일본에 결여된 것이 바로 이 자연상태에 대한 상상력이라 간주했다. 근대 일본에서는 국가 통치의 기반이 저 전복의 가능성, 즉 내전, 소요, 반란, 혁명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는 진단이었던 것이다. 그는 1960년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10만명의 시민을 보며 한 편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최초의 자연상태적 정치 행위를 목도했지만, 뒤이은 기시 정권의 재계와 관료 지지에 힘입은 통치 안정화 과정을 보며 근대 일본의 통치 문법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이후 그는 날카로운 정치 비판과 시민 계몽을 계속하지만, 끝끝내 그의 뿌리 깊은 근대 일본에 대한 냉소와 허무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일본은 패전이라는 파국 속에서도 결코 자연상태의 위험성을 정치의 기반으로 삼지 못했으며, 그런 한에서 생생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비관한 셈이다.

마루야마가 생존해 있었다면 노다 정권의 이번 결정을 보면서 또 한 번 좌절과 절망을 맛보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패전 전 일본의 파시즘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논단의 총아가 된 이래,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한 것은 핵전쟁이라는 인류 차원의 파국 가능성 속에서 근대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를 냉철하고 설득력 있게 설파했기 때문이었다. 미일 안보조약이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일본 전체의 생존을 내맡기는 결정이었기에, 그의 안보조약 비판은 핵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핵이란 인류차원의 재앙을 근대 일본의 통치 문법 속으로 녹여버리는 일본의 정계, 재계, 관료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금번 노다 정권의 재가동 결정을 보며 일본의 지성계는 어떤 대응을 할까? 아니 어떤 느낌을 갖고 있을까? 과연 마루야마의 절망이 반복될까?

최소한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시민의 자연상태적 저항의식은 아직 생생하게 약동 중이고, 그런 한에서 지식인들도 ‘새로운 계몽’의 길을 모색함으로써 지성계의 자기 갱생을 도모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 여러 시도들을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교류해온 여러 친지들이 전해주는 정황은 진정 ‘자연상태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기에 그렇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민주주의는 착한 시민들의 의식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내장된 위기 극복의 상상력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향후 일본의 자연상태가 어떤 식으로 창출되고 극복될까? 인류 차원의 재앙 속에서 한 줄기 빛은 그 혼란 속에서 어렴풋이 이 땅을 비출 것이다.

 

※ 본 원고는 서남포럼의 주된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서남포럼(201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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