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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한 여자의 육체 - 파블로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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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01 11:35 조회35,4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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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 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 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

나만 알고 있는 연인의 육체는 참 특별한 것이죠. 사랑에 빠진 이에게는 연인의 다정한 표정, 우아한 몸짓만이 아니라 점이나 보조개, 주름 하나까지도 매력적이고 숭배할 만한 것입니다. 사랑에 얼이 빠진 시인 좀 보세요. 방심으로 가득 찬 눈이나 느리고 슬픈 목소리조차 경이롭다고 외칩니다. 딴 사람이 그녀를 보았다면 "뭐 저런 어리숙한 시선에다 소울음처럼 느릿하고 답답한 목소리가 다 있나?" 할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얄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연인에게 신적인 매혹의 권능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전능한 연인에게서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니까요. 나의 연인이 그런 신적 존재라면 그 사랑을 받는 나는 세상의 모든 위험과 불운이 피해갈 것 같습니다. 하긴 그래요. 시인이 말한 터널처럼 텅 빈 외로움을 피해 가려면 정말 특별한 행운,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여신의 가호가 있어야 합니다.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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