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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빈집 - 백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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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5-25 16:17 조회25,9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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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쑤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뱅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소원과 욕망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어요. 여러 색실들을 엮어 이집트 소원팔찌를 했다고요. 이쁘게 손목에 매어져 있던 팔찌가 어느 날 툭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아 산뜻한 상상. 처음 한 달은 그랬어요. 6개월쯤 지나니 색이 바래고 냄새나고 찝찝하고. 1년 6개월이 지나자, 이젠 실이 너덜거리고 아주 엉망. 소원이고 뭐고 얼른 끊어져 줬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하지만 모질게 면도칼 같은 걸로 자르진 못하겠고. 그러니 앞으로는 함부로 빌거나 무언가 감히 욕망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결심이 바로 집 떠나려는 결심이었군요. 소원이 안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너절하고 비루할 줄은 미처 몰랐는데…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서 그랬던 건가요. 모질지 못해 남아있는 이들에게 자꾸만 슬켜서, 자꾸만 슬퍼서.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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