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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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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5-07 14:55 조회20,2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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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제목을 차용한 데 대한 양해부터 구해야겠다. 80년대 말 주목받았던 한 소설가의 데뷔작 제목인 까닭이다. 이즈음의 정치현실을 짚어보고자 하는 글로서는 느닷없어 보이지만, 복잡하게 얽힌 정치판을 보노라면 마치 주문(呪文)처럼 이 문구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쌓아오고 어렵게 다져왔던 시민사회의 터전이 마치 세찬 역류를 맞은 것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정치권력보다 더 깊은 곳에서 작용하는 사회변화의 힘을 되새기고 싶었을까?


이 역류를 멈추게 하고 변화의 열망을 실현할 계기로 기대했던 총선이 뜻밖의 결과를 빚은 후 대다수 국민은 국민대로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충격에 가까운 혼란을 겪고 있는 듯보인다.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쪽이 오히려 선거에서 승리하는 현실이 시민들의 감정구조에 끼친 영향은 작지 않을 법하다. 그럼에도 정권심판을 요구하는 여론의 힘을 업고 야권연대를 이룩한 민주당과 진보당은 선거 패배를 발본적으로 반성하고 혁신해나가야 할 시기에 계파갈등과 내부비판에 휩싸여 있다.


민주당의 원내대표와 당대표 선출을 둘러싼 담합 의혹도 그렇다. 당내의 주요 계파들이 힘을 합쳐 지도부 선거에 임하겠다면, 여기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쪽에서의 다른 연대도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상대가 용납할 수 없는 ‘담합’을 했다는 도덕적 비난이 앞선 나머지 단합의 장이 돼야 할 지도부 선거가 국민의 눈에는 너나없이 제 몫 챙기기에 나선 계파주의로 비쳐진다.


진보당의 비례대표 부정투표 문제는 더 심각하다. 통합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진보정치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정당이 당내 선거절차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실력이었나 하는 실망도 실망이지만, 여기에 계파 간의 이해가 개입되어 있다니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한숨부터 나온다. 실력부족이든 도덕불감증이든 진보정치에 기대를 거는 많은 국민들의 바람을 저버리는 짓이다.


물론 정치집단인 정당이나 정치인의 활동을 엄격한 도덕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온갖 흠결과 부패의 온상으로 여겨지는 보수권력에 비해 진보진영에 과도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관점도 있을 수 있다.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에서는 가령 국가건설과 같은 큰 목표를 위해서, 심지어 간계나 회유까지 포함한 갖은 수단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목적만 좋으면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식의 마키아벨리즘이 지배하는 순간, 그 좋은 목적마저 왜곡되는 결과를 빚고 만다는 것 또한 상식이다.


그렇다면 개혁이나 진보를 표방한 정당들이 행사하는 정치적 수단의 한계치는 어디인가? 변혁적 정당의 의미를 그 정당이 대중과 유기적으로 맺어져 함께 호흡하는 데서 찾는 이탈리아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고전적 언명은 지금도 환기할 만하다. 이런 정당을 ‘현대의 군주’라고 부른 그람시는 정당 활동이 마키아벨리적인 속성을 띤다는 전제 아래서도, 대중의 정서와 감각을 벗어나는 순간 그 정당성을 잃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진보이념을 내세운다고 곧바로 도덕성이 확보된다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개혁이든 진보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여망과 시민의식은 적어도 정당 내외의 민주적 절차가 지켜지기를, 관행을 넘어설 정도의 도덕적 신뢰를 갖추기를 요구한다. 물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은 관행과 상식의 틀 자체를 깨는 창의적 활동을 통해서 구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전망도 절차의 민주성과 신뢰라는 바탕 위에서만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한가지 위안과 희망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당 내부 문제를 조사·공개하는 것도 진보당이기에 가능하다는 점이다. 훨씬 더 부패하고 기득권에 대한 집착으로 뭉쳐진 집단은 언제나처럼 치부를 포장하고 숨기는 데 급급하다. 그러나 야권은 이제 그나마의 상대적 우위조차 내세우기 어려운 백척간두에 서 있다. 진정 시대와 다수민중이 무엇을 바라는지, 저 아래 깊고 길게 흐르는 강물을 떠올려야 할 때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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