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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조그만 수조의 형광물고기 - 고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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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5-04 11:55 조회21,6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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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없고 약속이 없다
창자가 다 보이는 나는 형광물고기
뱃속에 불을 켠 독거 생명체
희미한 형광등 불빛을 뱃속에 달고
물속을 건너가는 작은 물고기
끊어진 실 같은 자궁과 상처와
나는 말한다, 나의 장난감은 나뿐이다
두려울까, 나의 친구는 나밖에 없다
반복과 헛됨의 옷을 벗어버린 물고기는
저쪽이 없는 고독한 물고기
지하의 환한 투명수조 속을 가고 있다,
아 작은 용적의 물이 있는 한……
수초도 없는 물속을 다가오는 나
뱃바닥과 주변 물을 밝히는 물고기
닳아버린 망사의 지느러미를 흔들며
은빛 낚시도 없고 미끼도 아닌
미세한 물속의 먼지에 입질을 해본다
투명물고기, 자신의 죽음만 있는
숨막히는 적막한 가득한 물속의
영혼의 물고기, 형광물고기


괴테는 1820년 로베라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따듯한 감정의 천국에서 추방되기 때문이죠." 당시 괴테는 70세. 그 나이라면 추방되고 추방되어 아마 더 이상 쫓겨날 곳도 없는 어떤 감정의 막다른 골목을 숱하게 경험했겠지요. '사랑이 없고 약속이 없다'는 시의 첫 행에서 수만 번의 추방 뒤, 오로지 자신의 투명한 영혼과 호젓하게 마주한 어떤 사람을 봅니다. 언젠가 우리의 속을 불투명하게 채우고 있던 욕심과 오욕과 절망이 다 소화되어 사라질 거예요. 오직 끊어진 실 같은 자궁과 상처만이 형광등처럼 환히 빛난다면. 와아, 그런 이의 노년은 청춘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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