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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2013년 체제, 어떤 대통령 나오느냐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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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4-23 10:31 조회32,1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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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백낙청 인터뷰(바로가기)

 

"2013년 체제, 어떤 대통령 나오느냐가 관건"
백낙청 "야권 대선후보, 71년 DJ처럼 색깔공세에 맞서라"

김윤나영 기자(정리)       


4·11 총선에서 야권은 비록 패했지만 연대를 통해 적잖은 성과도 남겼다. 야권연대 과정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연대의 밑거름이 된 이들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함세웅 신부 등 사회원로 21명이 이끄는 '희망2013‧승리2012 원탁회의(이하 원탁회의)'였다.

 

원탁회의는 당초 야권의 통합을 시도했고, 거기엔 못 미치지만 어렵사리 성사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연대가 파기될 위기에 처하자 또다시 나서서 야권연대를 지켜내기도 했다. '이정희 부정선거 파문'으로 연대가 좌초될 위기에 놓였을 때는 이정희 후보에게 사실상 사퇴를 권고하면서 수습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진 야권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분열상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민주통합당에서는 '중도 강화론' 논란이 한창이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중도층을 끌어안는 데 실패했고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문재인 상임고문이 "일리가 있다"고 화답했다. 민주당이 지나치게 '좌클릭'해서 중도층을 끌어안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낙청 교수는 지난 19일 있었던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중원을 놓친 이유에 대해 반론을 폈다. "민주당의 패인은 좌클릭 때문이 아니라 일관된 노선을 견지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했고 국민을 대하는 겸허하고 진솔한 태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 교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제주도 해군기지 부지를 강정마을로 선정한 것은 노무현 정부"라면서 이제와 두 사안을 반대한다고 해도 민주당의 판단이 왜 바뀌었는지를 분명하고 겸허하게 설명했어야지 반대하는 과정에서도 일관성이 떨어지다 보니 국민의 신뢰를 못 얻었다고 비판했다.

 

백 교수는 오래전부터 '1987년 체제'를 마무리하고 '2013년 체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창해 왔다.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남북연합 건설 등으로 집약되는 '2013년 체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야권이 총선과 대선 모두 승리해야 했지만, 총선에서 패한 지금도 때는 늦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이제 과제는 새로 개원할 19대 국회에서 야당이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으로 모아졌다. 백 교수는 "야당이 기존에 추진하려던 정책 중에서 새누리당과 절충해서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반값 등록금을 예로 제시했다. 그는 또한 "새누리당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국민이 보기에 '저런 것도 안 받아주는가' 싶은 것들을 계속 시도해야 한다"면서 "국민들이 박근혜는 이명박과 다르다더니 알고 보니 똑같이 못한다고 느낄 만한 상황을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민주당이 총선 실패에 대한 반성과 쇄신 없이 무작정 안철수 서울대 교수에게 입당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백 교수는 "덮어놓고 들어오라고 요구하기 전에, 민주당이 안 교수와 같이 해볼 만한 정당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들어오라고 요구해야 순리"라며 "민주당 내에서도 대선후보가 모든 것을 걸고 당을 책임지러 나서야 국민이 감동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야권이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비전과 구상 없이 'MB 심판론'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1971년 김대중이 그랬듯이 야권의 대선 후보가 색깔공세를 각오하고서라도 천안함 문제를 들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편집자> 
 
프레시안 : 4·11총선에서 여야가 비긴 것이라는 평가도 있고, 수도권이나 투표율을 보면 야권이 '사실상 승리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야권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총선 결과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2013년체제' 만들기를 위해 총선승리가 우선 중요하다고 말씀해오셨는데, 승리하지 못해 차질이 빚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총선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그것이 '2013년체제' 만들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백낙청 : 이번 선거는 분명히 야권이 졌다. 그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비겼다느니, 야권이 사실상 승리했다느니 하면서 위안을 찾으면 안 된다. 다만,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하는 선거에서 졌기 때문에 참담한 것일 뿐, 문자 그대로 '참패'는 아니다. 이번 선거에 졌다고 절망할 건 아니라는 점에서 여러 사람이 지적하는 총선 결과의 긍정적인 면에 동의할 수는 있다.

나는 2013년체제를 제대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총선승리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 총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예봉을 꺾어놔야 대선도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이기더라도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고 2013년체제 건설이 순조로우려면 같은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덧붙이면, 19대 국회를 야당이 장악해서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에도 2013년체제의 사전 정지작업 같은 걸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 했다. 그 세 가지 기대가 다 어긋나버렸다.

그렇다면 2013년체제를 포기할 것인가. '2013년체제'라는 용어는 내가 먼저 내놨지만, 그건 어느 개인이 포기한다 만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갈망,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시대의 요구를 대변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선을 꼭 이겨야 한다고 했는데 패배한 상황에서 2013년체제론을 여전히 고수하는 걸 어떻게 설명할 건가? 사실상 승리했다고 우기는 방법이 하나다.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지고도 한나라당 홍준표 당시 대표가 '사실상의 승리'라고 하고, 경기도 분당 보궐선거에서 졌을 때 다른 지역에서 이겼으니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라고 말했던 방식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홍 대표 자신이 신세를 망치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나가서는 희망이 없다. 뼈저린 성찰의 기회를 놓치는 것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건가? 정권의 향방을 가르는 건 원래 대선이지만 대선승리를 위해 총선승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데,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총선에서 이겼으면 대선에서 이기기 쉬워지는 면이 있을지 몰라도, 대선승리는 여전히 가능하다. 오히려 쇄신도 제대로 안한 야당연합이 어찌어찌 총선을 이겨서 그대로 가다가 대선에서 망했을 수도 있다. 그런 아찔한 시나리오를 피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대선에 이기더라도 새누리당이 다수를 차지한 국회 때문에 2013년체제 건설이 더 어려워질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대통령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그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이러면 '말 바꾸기' 한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생각이 짧아서 판단을 그르쳤다면 새로 공부해서 바꾸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웃음)

 

프레시안 : 야권 입장에서는 순조롭게 가야 하는데 대선에 차질을 빚은 것만은 사실이다. 이길 수 있었고, 이겨야 했는데 졌다.

 

백낙청 : 솔직히 민주당이 제1당은 못해도 민주·진보 두 당을 합하면 최소한 새누리당보다는 많은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내가 반성하는 것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에 집착하는, 불교식으로 말해 착심(着心)을 가지면 눈이 흐려진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서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러나 늘 평상심을 갖고 판단하며 대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민주당, 통합에 급급해 혁신 못했다"

 

프레시안 :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민주통합당이 총선에서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백낙청 : 선거전 자체를 보면, 민주당이 지도력과 전략도 없이 선거를 치른 것 같다. 민주당의 오만도 작용했다. 이명박 정부가 하도 죽을 쑤니 민주당 공천만 받으면 이긴다고들 생각한 것이다. 민주당만의 잘못은 아니지만 민주당의 책임, 특히 그 지도부의 책임이 크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민주당이 '혁신과통합' 등 외부세력과 합쳐 민주통합당을 만든 과정을 보면, '통합'하기에들 바빠서 '혁신'을 제대로 못했다. 통합도 원래 내걸었던 '대통합'에 못 미치는 부분통합이 됐고 그래서 통합진보당과 '연대'를 할 수밖에 됐는데, 나는 일찍부터 그 길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을 언급만 해도 민주당 안의 통합파나 '혁신과통합' 인사들은 대통합의 기운을 뺀다고 서운해했다. 그러다보니 '중통합'에 대한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정당법이나 민주당 당헌·당규를 제대로 확인도 않고 통합전당대회를 치르려다가 차질을 빚었고, 통합에 소극적인 세력을 충분히 설득하지도 못했다. 결국 지난 1월 중순에 가서야 새 지도부가 출범했다. 혁신을 하고 선거전략을 수립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던 셈이다.

선거연대 과정에도 양당 모두 제대로 혁신하지 못했다. 진보정당들은 자기네들끼리 먼저 통합한 뒤에 민주당 세력과 연대한다는 원칙을 진작부터 세우고 있었으나, '선통합'이 계속 늦어진 데다 통합진보당의 출범이 온전한 진보대통합도 아니고 내부혁신을 수반하는 통합도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선거연대는 달성했다. 더구나 전국적이고 포괄적인 선거연대는 헌정사상에 유례가 없었던 만큼 큰 의미가 있다. 물론 선거연대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었지만, 이 필요조건이나마 갖추었기에 대패를 면했다고 본다.

 

프레시안 : 통합에 급급해 혁신이 안 됐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민주당 내부에서는 공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백낙청 : 공천의 내용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릴 만큼 구체적인 사례들을 잘 알고 있지 못하다. 다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천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한 것은 분명하다. 방법상의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한명숙 대표는 취임하면서부터 국민에게 선택권을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대선 후보나 당대표 선출 등 전국적인 선거라면 몰라도 지역구별 선거에서 국민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 전국민이 의견을 모아서 특정 지역에 제일 적합한 후보를 선택하랄 수는 없는 일이고, 가령 지역구 주민들만 상대로 모바일 투표를 하는 것이 '국민의 선택'에 값하려면 훨씬 많은 연구와 준비가 필요했다.

비례대표 목록에 관해서는, 내 관점에서 새누리당보다는 민주통합당에 좋은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비례대표 공천을 누가 더 당의 전략에 맞게 잘했냐고 묻는다면 새누리당이 더 잘했다. 민주당은 지도력도 없고 집단적으로 합의한 전략도 없이 들쭉날쭉이었다.

 

"FTA와 해군기지 해명,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

 

프레시안 : 전국적 규모의 선거연대의 여파일지 모르겠으나, 민주당이 중원을 놓쳤다는 분석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국회의원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요구하며 미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일이 당 차원에서 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민주당이 너무 왼쪽으로 간 것이 선거의 패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백낙청 : 민주당이 중원을 많이 놓친 것은 사실이지만 젊은 층의 투표 참여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유 지지층도 제대로 규합하지 못했다고 본다. 아무튼 중원을 놓친 이유가 민주당이 전반적으로 진보 성향으로 이동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입장을 일관되고 설득력 있게 추진하지 못하면서 오락가락했기 때문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어디가 왼쪽이고 어디가 오른쪽인지에 대한 기존의 그림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좌클릭'으로 말하면 서민과 노동자 보호처럼 중원을 잡는 좌클릭도 있고 중원을 놓치는 좌클릭도 있는데, 구체적인 정책이나 노선이 얼마나 국민들의 요구에 부합 하느냐를 사안별로 따져야지 정해진 프레임 속에서 이쪽 또는 저쪽으로 몇 미터 이동할지를 두고 싸워서는 답이 안 나온다.

나는 정치분석의 전문가도 아니고 선거의 패인분석을 자세하게 시도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한미FTA나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기존의 단순논리를 벗어나야 할 사례들이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한미FTA에 관한 민주당의 당론은 폐기가 아니라 재협상이었다. 그런데 당론 변경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폐기론을 들고 나오고 당 대표가 직접 미국대사관 앞에 나가기까지 하니 민주당은 '못 믿을 사람들, 불안한 세력'이라는 역공을 받게 마련이었다. 실제로 "폐기 이전에 재협상을 시도하는 것은 국가 간에 당연한 수순일 뿐 아니라, 어느 대목이 어떻게 불리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면 차라리 폐기가 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선거전략일 뿐 아니라 국민들에 대한 예의다. 나는 민주당이 그렇게 할만큼 공부가 안 되어 있었지 않나 한다.

민주당이 중원을 놓쳤다면 한미FTA를 반대해서라기보다 반대하는 과정에서 전반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못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은 어느 날은 "참여정부 때 우리는 잘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재협상으로 망쳐놨다"고 했다가, 또 어느 날은 "참여정부 시절과는 상황이 바뀌었다"는 식으로 나왔다. 실제로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상황도 바뀌고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 미국 내에서도 바뀌었는데, 그렇다면 "그때는 생각이 짧아서 그렇게밖에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 죄송하다." 이렇게 진솔하게 고백하면서 문제점들을 사안별로 제시했어야 하는데 별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도 참여정부 때 시작한 사업을 민주당이 반대하는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치가 않았다. 나는 강정기지 문제의 본질은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본다. 정부가 마을 주민과 활동가들뿐 아니라 자치단체 제주도의 의견마저 무시하고 이렇게 폭력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민주국가에서 할 일인가.

대다수 활동가들은 해군기지 문제를 안보 대 환경, 안보 대 생명·평화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긴 안목에서 보면 국방 차원의 약간의 이익보다 생명·평화·환경의 가치를 중시하는 게 옳다. 하지만 선거를 치르는 정당이 안보와 생명 중에 양자택일하라는 식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국가가 있는 한 국방을 무시할 수 없고, 제주도에 군항이 하나 필요하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한 논리다. 반대하더라도 충분한 이유를 댔어야 했다.

군항이 필요하더라도 그 부지가 꼭 강정마을이어야 하는가는 별개 문제다. 그런데 불행히도 강정마을이라는 입지를 결정한 것도 참여정부였다. 민주당이 "군항은 필요한데 강정은 안 된다"라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어색한 상황인 거다. 민주당은 "그때 우리가 강정마을로 부지를 결정한 것은 잘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생각이 아니었고, 지역 주민들이 반대한다면 재검토할 계획이었다. 이명박 정부처럼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원점에서 재검토해서 여전히 군항이 필요하다면 이러저러한 곳에 세우는 게 훨씬 낫다"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강정으로 부지를 결정해놓은 당사자들이 대안에 관한 연구도 없이 반대하니 모양새가 이상해졌다.

요컨대 민주당의 패인은 '좌클릭'보다도 노선의 일관성과 국민을 대하는 겸허하고 진솔한 태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프레시안 : '무상급식' 사태 이후로 민주당이 진보정당 수준으로 변했고, 새누리당이 민주당 수준으로 변하는 등 전반적인 국내 정치 지형이 왼쪽으로 옮겨졌다는 평가가 있다. 지금 민주당이 견지하는 노선은 괜찮은 정도인가?

 

백낙청 : 새누리당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왼쪽으로 갔는지는 두고 볼 문제지만, 외견상 과거의 민주당에 근접하게 된 게 사실이다. 민주당이 예전에 비해 '진보' 쪽으로 움직였다는 것도 사실인데, 둘다 전반적인 사회발전의 결과라 믿는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낡은 프레임을 깨면서 기계적인 '좌클릭'이 아닌 다양한 혁신적 민생정책들을 내놓을 때만 선거연대를 위해 진보당에 끌려갔다거나, 아니면 말로만 좌클릭이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다.

 

"진보 원로인사들, 쓴 소리 구체적으로 할 계획"

 

프레시안 : 이번 선거연대 과정에 시민운동 세력이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다가 정당에 새로 들어간 사람이 정치사회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기존 정치에 감염되기만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시민사회 출신으로서 정치에 입문한 사람의 역할은 무엇인가.

 

백낙청 : 시민사회단체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만도 10여 명이 이번에 새로 국회에 들어간 걸로 안다. 큰 숫자는 아니지만 하나의 소그룹을 이룰 만하고, 뜻이 통하는 다른 의원들과 힘을 합치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얼마나 잘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프레시안 : 백 교수를 비롯한 진보 원로인사 21명은 지난해 7월 '희망2013·승리2012 원탁회의'라는 모임을 만들고, 야권연대가 결렬될 위기에 처하자 중재에 나서 협상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바 있다. 시민사회는 정치와 어떤 관계를 정립할 수 있나.

 

백낙청 : 이전까지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관계는 두 종류로 분명히 갈라졌다. 하나는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유지하면서 시민운동에만 전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운동을 접고 정치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0년 지방선거 때부터 여야의 싸움에서 시민사회가 기계적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흐름이 형성됐다. 다만 자신이 정치권에 진출하지는 않고 야권의 여러 정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시민정치'라는 제3지대가 정착한 것이다. 이렇게 시민운동이 다양화되는 것은 하나의 발전이라 본다.

이런 의미의 시민정치가 6·2지방선거 등 여러 선거에서 야권연대를 만들어내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다. 게다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연대협상 과정뿐 아니라 시민후보의 선거운동에도 상당수가 깊숙이 관여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정당들이 "우리끼리 해볼 테니 시민사회는 끼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들이 협상 결렬을 선언하자 비상시국회의가 열리고 난리가 났다.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정당끼리 잘해보겠다니까 알아서 야권연대를 성사시키라는 것이었지, 하다가 안 되면 알아서 결렬시키라고 맡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민정치가 다시 이런저런 압력을 가하면서 개입했고 결국 야권연대에 일조했다고 본다.

 

프레시안 : 백 교수는 원탁회의를 진행하면서 야권연대 과정에 직접 관여한 적이 있다. 앞으로 원탁회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예정인가?

 

백낙청 : 원탁회의는 나중에 '혁신과통합'을 만들어 결국 민주통합당에 들어간 인사들과 진보당 당원은 아니지만 한국진보연대 소속으로 진보정당과의 친연성이 분명한 분들,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비정파성을 고수하는 성향의 종교계와 시민사회 인사들, 크게 보아 이렇게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그러다보니 정책연합을 준비한다거나 선거연대를 꼭 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실제로 구체적인 작업도 진행했지만, 서로가 민감한 현안은 비켜가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원탁회의가 선거연대에만 매달리지 말고 민주당의 엉터리 공천도 비판하고 개입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항의성 주문도 받았다. 그러나 선거연대가 어쨌든 필수적인데 그것 하나조차 이루기가 쉽지 않았고, 또 시민사회 차원에서 특정 정당의 공천 내용에 개입할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공천 과정이나 내용을 제때에 알아내기도 쉽지 않았고.

앞으로는 원탁회의의 구성도 좀 달라지거니와, 역할도 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총선을 거치면서 정치권으로 빠져나간 분들이 적지 않고, 전반적으로 원탁회의는 비정파적 시민정치의 성격이 강화되리라 본다. 게다가 총선까지 졌으니 이제는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기 위해 각 정당과 정파 사이에 최대공약수나 찾다가 때로는 아무 말도 못하는 조직은 필요없게 되었다. 비정파성을 유지하되 여러 정파에 대해 기탄없이 입바른 소리, 쓴 소리를 하고 필요하면 행동으로 압박하는 원탁회의가 아니면 존재감이 없어질 것이다.

 

프레시안 : 대선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인가?

 

백낙청 : 비정파성을 표방하는 시민사회 조직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개입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한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막연히 '좋은 말씀'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민주당이 정신을 못 차리면 구체적인 문제점을 짚어서 지탄해야 할 것이고, 통합진보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 안철수 교수가 대권도전에 나서서 별도의 캠프를 설치한다면 그 캠프에도 할 말을 해야 할 것이다.

 

"통합진보당, 계파 갈등 남기고 쇄신 없이 물리적 봉합만"

 

프레시안 : 이른바 '노동자 벨트'인 울산과 창원에서 통합진보당 후보가 떨어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통합진보당의 노동자 대표성이 약화됐다.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 노동 문제인데 이번 낙선에 대한 우려가 높다.

 

백낙청 : 통합진보당으로서는 아픈 대목일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과거보다 의석수가 늘어나 13석을 차지했고 수도권에서 진출한 것은 큰 성과지만, 울산과 창원에서 전멸한 정당이 진보정당 맞느냐는 쓴 소리를 들을 만하다. 실패한 이유 중에는 공천을 잘못한 점도 있을 것이다. 좀더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면, 통합진보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대로 쇄신을 못했고 계파 간 갈등을 그대로 안은 채 물리적인 봉합에 멈춘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통합진보당이 한국사회의 노동문제 해결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복무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가령 비정규직 철폐나 해고 금지에 대해 통합진보당이 민주당보다 훨씬 적극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복지의 모범이라는 북구나 서구 국가에도 비정규직은 있다. 진정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수호하는 정당이 되려면 '비정규직이어도 살 만하고, 해고가 돼도 죽지 않고 조만간 재고용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할 설득력 있는 프로그램을 제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쌍용자동차의 경우처럼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한 것마저 안 지킨다든가 한진중공업 사태에서처럼 노동자들을 인간 폐기물 취급하는 해고를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로는 '정리해고 반대'를 대중적 구호로 채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당은 운동성 구호를 넘어 실현 가능한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데 한국의 진보진영이나 진보정당은 아직도 너무 추상적인 구호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민주노총이나 통합진보당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비정규직 철폐 강경노선을 견지함으로써 대기업 노조원이 특혜를 누리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지속되는 상황을 오히려 연장하는 데 일조한다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다.

 

"'박근혜 정도면 괜찮겠지'…이명박 후보 시절에도 그랬다"

 

프레시안 : 새누리당은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영입해서 경제 민주화와 복지에 대한 화두를 꺼냈고,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하면서 스스로를 미래 세력이라고 칭했다. 유권자 입장으로서는 새누리당이 저 정도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도 괜찮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법하다. 하지만 백 교수는 지금의 보수는 합리적 보수가 아니라 수구세력이기 때문에 타협하기 어렵다는 지론을 견지해왔는데, 일단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행보만 보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아 보인다.

 

백낙청 : 먼저 수구와 보수의 차이에 대해 한마디 하자. 보수주의는 그 나름으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이념이고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중 어느 게 좋은지는 상황에 따라 판단할 문제다. 동시에 청렴과 정직 같은 덕목은 보수·진보의 구별 이전의 기본적 덕목이다. 그런데 수구는 자기가 온갖 반칙과 특혜를 통해 얻은 기득권이라도 그걸 지켜내는 게 지상목표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사회가 잘되려면 당연히 그들이 헤게모니를 잡아서는 안 되는데,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잇따라 거치면서 수구세력의 주도권이 엄청나게 커져 있다. 그래서 합리적 보수주의자는 그들에 반대하다가 힘을 못 쓰고 말거나, 수구가 주도하는 수구·보수 동맹에 가담해서 수구세력의 헤게모니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 나의 인식이다.

박근혜 비대위원장 이야기로 돌아가면, 정치인으로서 이번 선거에서 그가 남다른 내공을 발휘했다는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자신 박근혜씨가 단순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광을 업었다거나, 신비의 베일에 가려 이미지만 있고 내용은 없다는 분석에 전부터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야당이 계속 국민을 불안하게 하면 국민은 "박근혜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2013년체제론을 처음 제기할 때부터 강조했듯이('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2013년체제 만들기>, 38-39쪽) 그건 2007년에 "이명박이 경제만 살려주면 됐지" 하는 '작은 원(願)'에 머물다가 온나라가 곤욕을 치르게 되었듯이 또 한번 '너무 작은 원'에 머물러 낭패를 당하는 길이다. 사실 박근혜 위원장이 말로는 미래를 얘기하지만, 그의 정책, 행태, 지지기반 어느 것을 보아도 2013년 이후의 한국을 크게 바꿀 전망은 없다. 선거승리를 위해 색깔 공세를 서슴지 않는가 하면,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를 내세워서 정작 같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비켜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명박정부를 감싸기도 한다.

 물론 박근혜씨 개인은 이명박 대통령보다 품위나 개인적인 신뢰감이 월등하다. 당장 들통 날 거짓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국민 앞에서 정직하지 않다. 정직하지 않을뿐더러 '2013년체제'에 대한 성원이 약한 국민을 홀리는 능력이 상당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지난 4년간을 '이명박정부'라고 하지만, 사실상 'MBP(이명박-박근혜) 연합' 정부였다. 한나라당의 친박계와 친박연대 의원을 빼면 국회를 좌지우지 할 수 없고, 대통령이 그렇게 폭주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예산안이나 각종 악법을 날치기 통과할 때도 본인이 직접 참여하거나 지지하기 일쑤였다.

물론 새누리당으로 개명하면서 정강 정책도 많이 바꾼 것을 과소평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첫째 재벌개혁과 부자증세 같은 핵심 사안에 부딪쳤을 때 경제 민주화를 얼마나 해낼지 의문이지만,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박근혜 위원장이 보여준 의사결정과정이나 실행방식은 이 대통령의 '불통' '일방통행' 자세와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제왕적 기질이 훨씬 더 몸에 배어서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지 모른다.

아무튼 2013년체제가 한국사회, 더 나아가 전체 한반도 주민의 복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고해지고 그걸 향한 우리들의 준비가 진행될수록, 아무리 이명박보다는 '괜찮다' 해도 박근혜 정권으로 우리의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넓어질 것이다. 물론 이번 총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원탁회의에서는 '2013년체제'라는 말이 대중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희망2013'이라는 구호를 만들어내고 '희망2013·승리2012'를 내걸면서 '희망2013'을 앞에 놓았다. 2013년 이후를 깊이 고민하고 준비해야 2012의 승리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여야간에 '희망2013'을 얘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됐나? 다들 '승리2012'에만 집착했다. 야당이 2013년 이후의 새세상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 국민 가슴에 와닿는 얘기를 못하다보니 결국 승리는 박근혜 위원장의 일사불란한 지휘를 받은 새누리당에 돌아갔다. 다가올 대선에서도 '희망2013'은 여전히 '승리2012'의 관건이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대선 후보급 인사가 대권 포기하고 당 이끌어야 국민 감동"

 

프레시안 : 민주당이 통렬하게 자기반성하면서 쇄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총선에서 패배한 다음날 아침에 한명숙 전 대표가 사퇴할 줄 알았는데 안했다. 총선 뒤 민주당이 추스르는 과정은 어떻게 평가하나. 잘 하고 있거나 반성하는 것 같은가?

 

백낙청 : 잘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한 대표의 사퇴가 늦었다는 점에 나도 동감이다. 문성근 대행체제로 가려는 발상도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문 최고위원이 대행을 맡자마자 방송사 파업현장을 찾아간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문 대행이 '민주당이 오만해서 졌다는 것은 수구언론이 만들어낸 프레임인데 사람들이 걸려들고 있다'고 말했다는 보도에는 놀랐다.

물론 요즘 언론보도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매사에 수구언론을 탓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는 일이다. 나도 수구언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있지만, 조·중·동이 한 말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틀렸다는 법칙은 없다. 국민이 조·중·동에 오도돼서 민주당이 오만했다고 생각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오만하다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

민주당이 전당대회 때까지 대행체제로 가지 않고 5월 초순 원내대표를 선출해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3주간 대행체제-2개월 비대위체제-7월 전당대회에서 대표선출'이라는 3단계 일정은, 그렇게 절충할 수밖에 없었던 당내 사정을 이해하더라도, 국민들에게는 지금이 그렇게 한가한 때냐는 느낌을 준다.

비대위체제의 모범사례는 박근혜 비대위다. 하지만 총선이 끝난 지금 공천과 정강·정책 변경까지 해내는 그런 비대위를 운영할 시기는 아니고, 민주당 안에 그럴 만한 인물도 없다. 하지만 선거에 져서 비대위를 꾸린다면 좀 비상한 맛이 있어야지, 원내대표가 맡아서 전당대회 관리나 하겠다는 것도 한가한 얘기다. 더구나 비대위에 어떤 사람이 들어가겠나. 대권주자들은 당연히 빠질 테고 현 지도부에서도 책임질 사람들 빠져야 맞고 전당대회에서 대표 경선에 나갈 사람들도 빠질 것이다.

아무튼 3단계 일정을 예정대로 밀고 가든 아니든 민주당은 하루 속히 지도급 인사들이 난상토론을 벌여서 당의 새로운 지도체제에 합의해야 한다. 과정은 경선 형식을 거치더라도, 합의 추대하고 단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가 비대위원장이 되든 차기 당대표가 되든 그를 중심으로 바뀌는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

 

프레시안 : 민주당이 쇄신해야 하고 지도력도 다시 세워야 하지만, 당 내에서 절박하거나 뼈아픈 반성은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해결방안은 무엇인가. 특히 지도력의 부재 문제에서의 해법을 조언해 달라.

 

백낙청 : 글쎄, 내가 무슨 해법을 내놓을 처지는 못 되고, 다만 이런 시국에 당을 이끌려는 사람은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다. 가령 대선주자 중에서 손꼽을 만한 위치에 드는 후보 중에 누군가가 "당의 위기를 맞아 이번에는 대선의 꿈을 접고 당을 살려보겠다"고 나와준다면 감동이 있지 싶다. 그렇지 않고 이런저런 당직을 거친 사람을 끌어내서 재활용하거나 또는 특정 계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경선 싸움을 잔뜩 벌인 뒤에 당선자를 뽑는다면 누가 감동을 받고 당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중량감 있는 대선주자를 당의 지도자로 끌어내려면 본인의 결심도 결심이지만 계파를 넘어 그를 옹립하려는 당내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민주당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일단 지켜보는 마음이다.

 

"새 국회, 새누리당 치부 드러내는 정책성과 내야"

 

프레시안 : 남은 과제는 두 가지라고 본다. 우선 19대 국회가 개원하면 비록 야당이지만 민주당이 국회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아울러 민주당은 앞으로 좋은 대선후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일단 19대 국회 활동에 대해 제안하자면?

 

백낙청 : 다수당이 되면 반값 등록금을 법안 제1호로 통과시키겠다는 것이 민주당의 몇 안 되는 분명한 민생 공약이었는데, 소수당으로서도 일단 시도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꼭 반값이 아니더라도 새누리당과 절충해서 등록금을 표나게 삭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야당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고, 합의하는 국회를 만드는 데도 공헌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왕 추진하겠다던 정책 중에서, 또는 민생을 위해 반드시 추진해야 할 정책 중에서 새누리당과 절충해서 실현할 수 있는 걸 실현하는 일이 하나 있다.

둘째로 새누리당이 안 받더라도 국민이 보기에 "저런 것도 안 받아주는가" 싶은 것들을 계속 시도해야 한다. 여당의 반대로 실현이 안 되더라도, "박근혜는 이명박과 다르다더니 정작 국민이 원하는 일을 못해주기는 마찬가지네"라고 국민들이 느끼도록 만드는 거다. 다만 이런 일을 당리당략의 차원이 아니라 2013년체제를 준비하며 국민을 설득하는 큰 전략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안철수든 김두관이든, 박근혜에 대한 경쟁력은 비전과 설득력"

 

프레시안 : 민주당으로서는 안철수와 결합해야만 대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공개적으로 안철수에 대한 구애도 나오고 있고, 문재인도 슬슬 대선가도에 시동을 건다는 보도가 있다. 경쟁력이 있으면서도 좋은 대선후보를 뽑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백낙청 : 말씀하신 안철수 교수와의 결합 문제가 최대의 변수가 아닐까 한다. 민주당과 진보당의 연대도 물론 새로 협상해야겠지만, 양당의 연대 자체는 4·11총선 이후로 하나의 상수(常數)로 자리잡았다. 총선은 지역구마다 승자독식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연대가 유달리 어려운 선거인데 그걸 해냈으니 공동정부 구성을 위한 대선연대는 한결 쉬우리라 예상된다. 문제는 양당의 연대만으로는 선거를 이길 수 없고 이른바 무당파층을 대거 합류시켜야 하는데, 이때 기존의 야당들, 특히 민주통합당이 안철수 지지세력과 어떤 식으로 연합을 하는가가 관건이 될 거다.

나는 총선 직전에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총선에서 야권이 지면 안 교수에 대한 요구가 더 커지겠지만, 안 교수로서는 더 난감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안 교수 아니면 누가 나와도 어렵다는 여론이 퍼지는 대신, 그가 나온다 한들 박근혜 후보를 꺾을 수 있겠냐는 측면에서 그렇고, 또 설령 당선이 된다 해도 국회를 새누리당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성공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안 교수가 출마를 결행할 경우 무엇보다 야권의 단일후보가 될 거냐, 그리고 본선에서 박근혜를 이길 정치적 역량을 지녔느냐가 초점이다. 나는 안 교수와 일면식이 없어 그의 정치력이나 성향에 대해서도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그가 정치력을 갖췄다고 전제하면, 그는 새누리당 지배의 국회와도 소통하고 타협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비교적 많이 갖춘 인물이지 싶다. 다분히 중도적인 정치성향도 그렇고, 소통하고 화합하는 능력을 줄곧 강조해온 점도 그렇다. 하지만 성공한 CEO라는 경력에 너무 기대하는 건 잘못이라 본다. CEO로서의 경험 자체야 소중한 자산이지만 정치에서는 오히려 역작용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기업이야말로 수직적 위계질서가 군대 다음으로 강한 조직 아닌가. 2013년체제가 요구하는 민주적 리더십과는 거리가 먼 것이 기업 CEO의 일반적 자질인 것이다.

아무튼 새누리당 국회와 화합하고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도 선거에서 확실하게 이겨야 한다. "총선 결과가 아니라 대선에서 던진 표가 진짜 민심"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여소야대 국회가 타협과 절충에 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압승'까지는 아니더라도 '낙승'을 해야지 겨우 1~2% 이겨서는 곤란할 게다.

최근에 윤리적인 문제가 불거진 새누리당 당선자 두 명이 탈당하면서 여당의 과반수가 무너졌는데 앞으로 이런저런 재선거·보궐선거를 치르면서 의석이 더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제1당 지위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진다면 수구세력의 헤게모니가 크게 약화된다는 의미다. 그런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은 새누리당 내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동조를 끌어내면서 2013년체제의 건설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본다. 잘만 되면 그게 더 확실한 길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수구보수세력이 갖는 지분을 일단 현실로 인정하면서 대응해야지 그들을 완전히 적대시하고 싸우면 노무현 대통령처럼 된다.

물론 이런 분석은 어디까지나 안 교수가 정치력이 있다는 가정, 아니면 안철수 외의 다른 사람이 충분한 유권자 지지를 획득한다는 가정이 달린 이야기다. 그런 가정이 통할지는 좀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안철수가 민주당에 입당하지는 않고 선거연대가 밖에서 끝난다면, 그 과정을 민주당이 잘 처리할 수 있을까?

 

백낙청 : 민주당이 안 교수에게 덮어놓고 들어오라 한다고 지금 같은 민주당에 그가 들어가겠는가. 안 교수더러 들어오라고 요구하기 전에, 그가 같이 해볼 만하다고 느낄 정당을 만드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동시에 안 교슈가 안 들어올 경우에 다른 방식으로 연합하는 방안까지 마련하는 유능한 정당이 돼야 한다. 안 교수 또한 작년 서울시장 때의 '박원순 모델', 즉 민주당 후보를 경선에서 물리치고 야권통합후보가 되지만 끝까지 입당은 않고 선거를 치르는 방식이 이번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리라 본다.

 

프레시안 : 김두관 대망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백낙청 : 김두관 경남도지사도 유력한 후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PK(부산·경남)지역이 대선의 승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고, 행정경험에다 이기고 지는 선거를 많이 치러본 것도 강점이다. 게다가 김 지사는 친노세력으로 분류되지만 친노 안에서 '성골(聖骨)'은 못 돼서 그런지, 참여정부에 대한 반성 의식이 대부분의 친노인사보다 강한 것 같다. 하지만 2013년체제 달성을 위해 어떤 구상을 하는지, 이를 위한 국정운영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그리고 김두관이든 누구든 박근혜에 대한 경쟁력은 바로 그 지점, 즉 2013년체제의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능력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남북관계도 획기적 비전 없이 MB 비판만 하면 못 이긴다"

 

프레시안 : 백 교수는 <2013년체제 만들기>를 통해 '2013년체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남북이 시대정신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남북연합을 이루고 정전협정 대신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깊이 공감하나 다만 지금의 객관적인 상황이 녹록지 않은 점이 문제다. 최근 북한이 로켓발사를 했고 북미관계도 악화됐는데 그런 인식을 민주당 지도부나 국민이 얼마나 공유할 수 있는가라는 면이 우려된다.

 

백낙청 : '남북이 공유하는 2013년체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었다. 남북한이 각기 시대구분을 할 때 1953년 정전협정 이후로는 내내 남북이 공유하는 기준이 없었다. 4·19 혁명이나 5·16 쿠데타, 5·18 광주항쟁, 6월 민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한 획씩을 긋는 사건들은 모두 남한에 국한된 것이었다. 유일하게 '6·15시대'라는 것을 2000년부터 공유하게 되었지만, 이는 다분히 선언적인 성격이다. '87년체제'를 '2013년체제'로 전환하면서 6·15공동선언 이행에 새로운 동력을 보탠다면, 그때는 남북이 공유하는 시대구분이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꾼다면 1953년체제를 남북이 동시에 마감하는 공통의 시대구분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한의 2013년체제가 북의 체제와 동질적인 것이 되어 '남북이 공유'한다는 뜻은 아니다.

남북연합은 평화협정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기획이다. 이렇게 차원이 다른 평화협정, 한반도 평화체제, 남북연합, 북의 비핵화 같은 문제들을 정밀하게 구별해가면서 실행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하지 않고 이것저것 뒤섞어서 주장한다면 국민들이 헷갈리게 마련이다. 물정 모르는 이상론자로 비치거나, 심지어는 '친북좌파'로 몰릴 수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서 곧바로 남북연합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우선 북핵 문제가 걸려 있다. 완전한 비핵화가 선행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핵화를 향한 의미있는 진전이 이루어지면 평화협정 체결이 가능한지, 단계적으로 진행하면서 실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북미수교도 평화협정의 절대적 선결조건은 아닐 수 있지만, 북미간 관계정상화가 병행되어야만 최소한의 평화협정이 가능할 거다. 이처럼 대북관계는 여러 문제가 뒤엉켜 있는데, 그 중 어느 하나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면 나머지 목표도 달성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비핵화를 내세우니 비핵화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오히려 북의 핵능력이 강화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평화협정을 먼저 해야 비핵화 협상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나와도 대화재개나 다른 영역에서의 성과가 안 나오기 마련이다.

평화협정이든 한반도 비핵화든 또는 한반도경제권 형성이든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과 작업을 잘게 나누어 가장 적절한 배합을 찾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2005년 베이징 6자회담이 만들어낸 9·19공동성명의 표현 그대로 '약속 대 약속,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진행하면서, 공동성명의 여러 의제들 간의 선순환구조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남북연합은 9·19공동성명의 의제가 아니고 6·15공동선언에 언급된 사안인데, 평화협정 이후에나 성취 가능한 목표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평화협정이나 비핵화, 북미수교 등이 이뤄질 때까지 손 놓고 있다가 그 다음에 시작할 과제도 아니다. 남북연합에 필요한 조건인 남북관계 개선, 교류증대, 경제협력 등이 차근차근 진행되는 과정의 어느 단계에 평화협정이 성사될 텐데, 그러한 진행을 돕기 위해서도 남북연합 논의에 시동이 걸려 있어야 하고 그런 성과들에 힘을 받아 남북연합 건설로 가는 복합적인 과정인 것이다.

 남북연합을 주장하면 흔히들 요원한 이상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2010년 천안함 이후 나온 5·24조치로 초보적인 남북교류마저 막혀 있는데 어느 세월에 남북연합까지 가겠냐는 식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또는 차기 정부가 과거 민주정부의 포용정책을 복원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경제협력을 확대하면서 북미관계 개선마저 이루어진다고 해서 북핵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철저히 현실주의적이고, 국내와 미국의 강경론자와 오히려 가까운 면도 있다. 다만 차이는, 강경론자들은 핵문제 해결방안이 없으므로 아예 대화하고 협상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기 일쑤인 데 반해, 나는 지난날 포용정책의 기조를 일단 복원해서 대화하고 협상하며 교류해야 하는 건 맞는데, 다만 그것만으로 핵문제가 풀리리라는 건 지나친 낙관이고, 남북연합의 건설 같은 좀더 획기적인 사업을 동시에 추진할 때나 비핵화의 길도 열리리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프레시안 :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에 맞먹는 획기적인 남북관계 구상을 위해서는 정권교체가 필수적인가?

 

백낙청 : 그렇다. 새누리당과 박근혜씨가 이명박 정부에 비해 좀 나은 분단체제 관리능력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박 위원장 자신의 대북관련 발언들을 보나 그의 지지세력을 보나 주변에 모인 전문가들의 성향을 보나 획기적인 전환은 상상하기 어렵다. 정권교체는 기본이고, '2013년체제 추진세력이 중심이 된 정권교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만 잘하면 미국이나 중국 같은 거대 강국들을 설득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이나 6자회담 재개에 번번이 발목을 잡으면서 확실히 보여준 것은, 적어도 한반도 문제에서는 한국의 입장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 대통령이 "어느어느 시기까지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밀고 나가면, 그 실현이 조금 늦춰지거나 앞당겨지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방향으로의 이동을 외국 정부가 바꿀 수는 없다고 본다.

거듭 말하지만 남북연합은 '원대한 이상'이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과도 직결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관계가 개선되고 대규모 경제지원이 주어지더라도 북은 안심하고 개혁 개방할 처지가 아니다. 베트남이나 중국과는 달리 북에는 남한이라는 위협적인 존재가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포기라든가 6자회담을 통한 보장을 넘어 남북 사이에 북측 정권의 지속을 전제로 분단현실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두 개 주권국가의 존속을 전제하되 양자 간의 분립 대결을 국가연합이라는 느슨하지만 종전과는 다른 차원의 양자 협력체제로 전환하는 일이다. 이는 또한 남북 간의 경제협력관계가 한쪽의 정권이 바뀌더라도 완전히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제도적 장치를 뜻한다.

물론 그런 남북연합 협약은 다른 협약들이 그렇듯이 폐기에 관한 절차를 두겠지만,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한 10년이면 10년이라는 기한을 정해서 그때 가서 다시 연장하거나 좀 다른 형태의 연합으로 전환하기로 해놓으면 남북 각기의 안정뿐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안정과 평화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것이다. 동시에 남북 내부의 진화동력이 강화될 것이다. 이 정도의 비전을 공유해야 핵문제의 최종적 해결도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런 획기적 구상은 없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때까지는 남북정책을 잘 했는데 MB가 망쳤다. 우리가 들어서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로지 'MB심판론'으로 이겨보겠다는 전략의 또 다른 버전이다.

 

"대통령 되려면 색깔공세 각오하고 천안함 들고 나와야"

 

프레시안 : 지금까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다보면 언젠가는 남북관계도 잘 되리라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앞으로는 좀 더 과감하고 혁신적으로 남북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요지로 정리된다. 그런데 백 교수는 책에서 천안함 재조사가 남북관계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무슨 뜻인가?

 

백낙청 : 현재 남북교류를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 5·24조치라는 건 누구나 안다. 야당은 이번에 이기면 5·24조치 철폐 권고결의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했다. 다수당이 못 됐으니 통과는 어렵겠지만 결의안 제출은 해볼 만하다. 그런데 야당 의원들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은, 5·24조치의 명분이 된 천안함 침몰사건을 어떻게들 생각하느냐는 거다. 북이 천안함을 어뢰로 공격해서 '폭침'시키고 해군 병사 46명을 죽였다는 것이 정부당국의 주장인데, 5·24조치 철폐 주장의 논리는 정확히 무엇인가? "북이 천안함을 공격한 건 사실이라 믿지만 세월이 지났으니 실리를 위해 5·24조치를 철회하자"는 것이라면 그런 실용주의적 논리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사과는커녕 사실인정과 유감표명도 안 받아내고 어떻게 그냥 철회하느냐.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는 반박 앞에 마냥 떳떳할 수는 없다.

천안함 진상규명이 되기 전이라도 물론 북미대화, 남북대화, 6자회담 등을 빨리 시작하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5·24조치 폐기를 힘있게 주장하려면 그것의 근거가 된 천안함 사건의 진상에 대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천안함 사건을 북이 일으켰는데도 5·24조치를 폐기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그런 논리를 일관되고 명확하게 전개해야 하고, 반면에 "당국의 발표를 검토했더니 북한이 했다는 증거가 안 보이더라"고 하면 5·24조치는 단순히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어리석은 결정이 아니고 실로 국가기강을 문란케 한 '반대한민국적'인 조치이다. 이런 것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규탄할 사항이다. 진보냐 보수냐, 화해냐 남북대결이냐 하는 대립구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적어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의해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다만 그러려면 야당 의원들 자신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더 공부해야 한다. 그동안 <프레시안>을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 제기된 의문점이 무언지 몸소 알아보고, 최소한 이승헌 교수의 <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를 읽거나 그것도 아니면 2010년 11월 17일 KBS <추적60분> 비디오라도 찾아서 봐야 한다.

그런데 정부와 수구언론이 천안함 사건을 친북 대 반북 프레임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언급하기를 굉장히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제는 총선도 지났으니 의원들도 좀 용기를 내볼 만하고, 특히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색깔공세를 각오하고 들고 나와야 한다. 박근혜 후보도 재조사에 응하라면서 대선 이슈로 만들고, 온갖 보수언론의 공세가 들어와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그 정도의 뚝심 없이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1년 대선 당시 4대국 보장 한반도 평화, 예비군 폐지, 남북대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을 때 얼마나 참신하고 충격적이었나. 빨갱이라는 비난도 잔뜩 들었지만. 야당 바람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이었다. 선거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부정선거로 야당 바람을 이기는 시대는 아니다.

물론 천안함 재조사에 '다 걸기'를 하라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민대중이 먹고 사는 문제에 답을 내놓되, 남북관계와 민주주의의 사활이 걸리고 실제로는 민생과도 관계되는 이런 사안에 대해 담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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