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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 버마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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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16 12:28 조회30,2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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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버마가 보도의 즐거운 초점이 되었다. 4월 1일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아웅산수찌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국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약칭 NLD)이 45석 가운데 44석을 휩쓰는 압승을 거두었으니, 만우절 최고의 이벤트다. 랑군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환호하는 시민들의 영상을 보며, 갑자기 버마가 궁금타. 정말 이 나라에 대해 부끄럽게도 무지하다. 몇낱의 기억만 희미할 뿐이다. 1961년부터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으로 활동한 우탄트(1909~74)가 먼저 생각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는 Mr.의 뜻으로 버마의 이름에는 성이 없다. 축구도 생각난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버마 축구는 강했다. 이름에 ‘몽’짜(‘몽’은 소년을 가리킴)가 들어간 선수들이 많은 버마축구단은 곧잘 한국축구를 누르고 우승컵을 차지하곤 했다. 그러나 길고 긴 ‘장군들의 철권통치(the generals' iron rule)’ 속에 버마는 우탄트 같은 국제인도 없고, 축구도 못하는 빈국으로 잊혀졌다.


그러더니 아웅산 테러사건(1983.10.9)으로 화들짝 우리 시야에 들어왔다. 아웅산 국립묘지 지붕에 폭탄을 설치해 버마를 방문한 한국 부총리를 비롯해 17명이 사망하고 합참의장을 비롯해 13명이 중경상 당한 이 사건으로 버마 정부는 즉각 북한과 단교했다.(버마는 1975년 남북한과 동시 수교했다. 이때 끊어진 북한과의 외교관계는 2006년에야 복구되었다) 아웅산(1915~47) 장군은 버마의 국부다. 랑군대학 출신의 반영저항운동가로서 일본의 버마 침입 때(1942) 일본과 협력한 뒤 다시 연합군쪽으로 돌아선 그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1947년 마침내 버마 독립의 약속을 영국으로부터 얻어냈다. 그러나 그해 7월 19일 정적에 의해 암살된바, 이 미완성이 그를 버마 독립의 영혼으로 불멸케 했다. 전두환 군사정권과 네윈 군부독재의 제휴를 빌미로 테러를 감행한 김일성 독재정권, 아시아의 세 독재가 버마의 성소(聖所)에서 파열한 이 사건은 80년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다.


사실 버마를 고립과 도탄에 빠트린 네윈(1911~2002)도 시작은 훌륭했다. 1930년대 중반 반영저항운동에 투신한 뒤 버마국민군의 일원으로 아웅산과 긴밀히 결속하여 해방투쟁을 벌인 군사지도자로 독립 뒤에는 특히 “군대는 결코 정치와 정부의 일에 관계해서는 안된다는 신조”(존 F. 캐디, 「버마의 군부통치」, 『사상계』 1961.6)를 견지한 ‘군인’이었다. 그런데 독립 이후 소수민족 문제(68%에 이르는 바마족과 무려 130여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버마는 지금도 이 문제가 뇌관이다)와 공산주의운동이 중첩된 갈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우누(1907~95, 랑군대학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48년 1월 출범한 독립정부의 초대 총리를 역임) 정부의 실패가 결국 네윈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1958년 국회의 요청으로 수상에 합법적으로 취임한 네윈은 ‘수습정부’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험을 바탕으로 1962년 쿠데타를 감행, 안으로는 계획경제를 추진하는 한편 밖으로는 비동맹노선을 내세움으로써 사회개혁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70년대에 이르러 일당독재의 모순이 증대함에 따라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의 효율성이 급속히 축소되고 만 사정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테러사건 이후 그렇게 또 잊혀진 버마와 다시 만난 건 6년전 서남포럼이 주최한 동아시아연대운동회의장이었다. 마웅저는 1988년 민주화시위를 계기로 운동에 참여한 뒤 1994년 군부의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온 망명자다. 그를 통해 두 가지에 대해 유념하게 되었다. 첫째 그들은 1989년 군부가 바꾼 미얀마라는 나라이름을 거부한다. 둘째 그들은 정식 망명자가 아니다. 한국정부가 망명을 좀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웅저를 비롯한 NLD한국지부 회원들의 지도자는 몰론 아웅산수찌다. 두살때 아버지를 잃은 아웅산 장군의 외동딸로 옥스퍼드에 유학한 뒤 그곳에서 정착한 그녀가 일시 귀국한 것은 1988년. 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뵈러 온 길에 수천명의 학생들이 군부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 참상에 충격받아, 헌신적 가정주부에서 돌연 지도자 없는 혁명의 전선에 나서게 된다.(Newsweek 3.14) 네윈이 하야하고(1988), NLD가 총선에서 압승했지만(1990), 네윈 후계군부에 의한 더욱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는 바람에, 민주정치의 틀만 갖춰지면 옥스퍼드로 돌아가리라는 그녀의 희망은 무려 24년간 지연되었다. 이미 아웅산테러사건이 네윈 몰락의 전조이듯이, 후계군부의 반동 또한 대세를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7년 사프론혁명(스님들의 가사 색깔 황색에서 이름을 딴 데서 짐작되듯이 이는 당시 불교승려들이 주도한 민주화투쟁을 이름)을 계기로 2011년 기나긴 군부독재가 끝나고 마침내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문민정부라야 간선으로 군 출신이 대통령으로 뽑힌 데 지나지 않지만, 프놈펜에서 열린 20차 아세안정상회의에서 참석한 테인세인 대통령이 NLD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현재 추진중인 변화를 계속해 나가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미얀마의 고르바초프’라는 별명에 일정한 신뢰를 부여했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군부와 아웅산수찌 사이에서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정확히 실천한다면 ‘랑군의 봄’도 머지않을 터인데, 이제 민주주의로 가는 첫걸음을 뗀 버마/미얀마의 순정에서 한국 내지 한반도도 함께 그 감격을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통신. 201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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