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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아리수를 마시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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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11 22:36 조회27,1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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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쯤 전에 독일에 유학갔을 때 나는 생수를 사서 먹을 돈이 없어 수돗물을 마셨다. 그때 선배 유학생들은 독일의 물에는 석회가 많기 때문에 반드시 끓여 먹어야 한다고 권했다. 한국의 물이 훨씬 좋다는 말을 곁들이면서. 당시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물을 끓이거나 설거지를 하고 나면 주전자나 그릇에 부옇게 석회가 끼는 것이 찜찜해서 물을 팔팔 끓여 석회를 제거한 후 차를 만들어 마셨다. 수돗물을 받아서 그대로 마신 적은 거의 없다. 유학가기 전 여름에 목이 마를 때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차가운 물을 먹던 버릇도 완전히 없어졌다.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독일에 가면 수돗물을 그냥 마신다. 차를 끓이는 게 번거롭기도 하지만, 염소가 들어있지 않은 수돗물 맛이 꽤 괜찮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석회성분이 들어있지만 그게 몸속에 쌓여서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항상 생수를 마신다. 차도 생수로 만든다. 음식을 만들 때만 수돗물을 끓여서 사용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수돗물은 소독이 아주 잘되어 그냥 마셔도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냥 마시지는 않는다. 이유는 수돗물 속의 염소가 물맛을 버려놓기 때문이다. 30년 전에 비해 물에 대한 감각은 더 예민해졌는지 정수기를 통과한 물이라도 염소맛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입과 코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난 3월 말 서울시에서는 아리수 음용행사를 열었다. 시장이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아리수를 마시는 장면도 보도되었다. 수돗물을 마신 후 박원순 시장은 아리수의 질이 세계 최고 수준이고 맛도 좋은데, 시민들이 마시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아리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라는 이유도 제시했다.


서울시민들이 아리수를 마시지 않는 이유가 막연한 불안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아리수에는 생수와 달리 염소가 들어있고, 생수에 비해 맛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서울시에서는 이런 아리수를 병에 담아 판매할 수 있을 정도로 질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투입했다. 결과는 지극히 초라하다. 시민의 1% 정도만 아리수를 그냥 마실 뿐이다.


서울시에서 시민들의 막연한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홍보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아리수를 직접 마시는 시민이 수년 안에 크게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에 염소가 들어있는 한 그 맛은 좋지 않을 것이고, 그동안 미각이 예민해진 대다수 시민은 생수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는 아리수를 판매하기 위해 투입한 돈이 아까운지 병에 넣은 아리수를 해외 판매나 원조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한다. 5000억원 가까운 세금을 아리수를 위해 썼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막대한 돈을 투입한 이유는 그걸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리수를 서울시민이 아무 고민 없이 마시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전임 시장 때 아리수를 페트병에 넣어서 여러 행사 때 나누어준 이유도 판매 홍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생수나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다. 페트병 아리수 판매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수돗물의 맛을 높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관건은 수돗물 속의 염소를 없애는 데 있다. 수돗물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염소가 들어있으면 시민들은 외면한다. 물론 수돗물에 염소를 넣지 않으면 오염이 발생할 수 있다. 수도관을 통과하는 동안 병원균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걸 막는 게 앞으로 서울시에서 해야 할 일이다. 낡은 수도관과 물탱크를 모두 교체하고 세심하게 관리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행히 서울시에서는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염소 소독을 중단하지 않으면 아리수 음용률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신문. 201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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