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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민간인 사찰과 박근혜라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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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04 11:49 조회29,0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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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명박 정권이 우리 사회에 ‘상식과 염치지심(廉恥之心)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4·11 총선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민간인 사찰 문제를 다루는 이 정권의 행태가 딱 그러하다. 정권안보를 위해 수많은 민간인을 불법사찰하고, 그 사실을 은폐·축소하기 위해 청와대와 검찰 등 국가기관이 공모한 사실이 드러났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상식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한국방송 새노동조합이 공개한 사찰문건 가운데 참여정부 당시 경찰의 감찰기록이 포함돼 있는 것을 기화로, 마치 민간인 불법사찰이 참여정부에서도 있었던 듯이 역공했다. 경찰의 직무범위 내의 감찰과 불법 민간인 사찰을 같은 반열에 놓아 국민을 속이려는 얄팍한 술책이다. 적반하장에 몰염치도 유만 분수다.
윤여준 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은 <대통령의 자격>에서 정권의 꼴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개발시대의 경제결정주의적·권위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대통령 탓이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들어 70년대 현대건설 사장으로 승승장구했던 이 대통령에게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뭘 해도 괜찮다는 개발독재 시대의 사고가 체화돼 있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의 임기는 1년도 안 남았다.


문제는 이명박 시대가 끝난다고 우리가 개발독재 시대의 낡은 사고에서 벗어날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은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미래권력으로 내세우며 ‘함께 미래로’를 외친다. 그런데 그는 이 대통령보다 더 분명한 박정희의 아바타다.


박 위원장도 아버지 박정희의 공은 계승하고 과는 바로잡겠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그를 부성콤플렉스의 전형으로 보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박근혜는 관념적으로는 아버지 시대의 공과를 구분해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공만 기억하고 과가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분석을 뒷받침할 근거는 여럿 있다. 자서전 기술이 대표적 예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가 “민족과 나라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셨고, 사심이 없었고, 그러니까 좌고우면 안 하고 그 일(조국근대화)을 해낼 수 있었다”고 썼다. 이런 박 위원장에게 5·16 쿠데타는 ‘구국의 혁명’이고, 유신과 긴급조치로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종신 대통령을 꾀한 것은 “북한의 남침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 때문이며,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희생은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일어난 일일 뿐이다. 이 대통령의 경제결정주의적 사고와 다를 바 없는 인식이다.


이렇게 말하면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 같은 분은 아버지의 책임을 박 위원장에게 묻지 말라고 나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딸이 아니다. 아버지 박정희에 기대 정치를 시작했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 확대를 위해 여전히 그 유산을 활용하고 있는 정치인이다. 그러므로 정치인 박근혜의 시대인식과 박정희에 대한 그의 평가는 분리될 수 없는 문제다.


예를 들어 그는 사학비리를 막기 위해 공익이사제를 도입하자는 사학법 개정안을 특정 이념 집단에 학교를 넘길 수 없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고, 제주 4·3 사건을 좌파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정당화한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도 역사적 쾌거로 칭송했다.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인 국가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한다. 그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내건 국가정체성은 이번 선거에서도 야당을 이념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으로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의 낡은 사고는 역사인식뿐 아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집단행동을 ‘법 위에 떼법’으로 몰아붙인 그의 사고는 아직도 성장을 위해 노동3권을 억압하던 70년대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편향된 국가관과 취약한 민주의식을 가진 채로 그가 우리의 미래가 되는 일은 우리 사회는 물론 그에게도 불행이다. 그런 불행을 막으려면 그 스스로 박정희란 낡은 외피를 벗어던지고, 21세기에 걸맞은 시대정신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국민 다수는 결국 그를 외면할 것이다.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2.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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