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THE FUTURE - 김현 > 회원칼럼·언론보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회원로그인

회원칼럼·언론보도

[진은영] THE FUTURE - 김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02 10:51 조회32,119회 댓글0건

본문

기지가 건설됐다.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그로써 달이 사라졌다. 파도가 가라앉았다. 푸른 자정의 순환이 사라진 심해에서 숨죽인 이들의 허파꽈리가 물거품으로 떠올랐다. 죽은 달의 사정액처럼. 앞으로 영영 기지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기지는 빈 기지일 뿐. 이름 없는 군함들이 기지를 조문하고 사라졌다. 기지의 노포핵이 껍질을 벗었다. 커졌다. 우뚝 섰다. 조준과 발사, 때때로 정체가 분명한 다국적 유령선들이 기지를 뚫지 못하고 해체됐다. 파스칼, 얼굴들은 물러나야 해. 물러나서 얼굴들은 기지의 촌에 숨어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해. 파스칼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얼굴들은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는 일의 기진맥진함을 저 멀리 불어 터진 허파들로부터 찾으려 했다. 기지는 홀로 드넓어졌다. 기지의 피스톤 운동을 피해 얼굴들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멸종의 미토콘드리아는 생물의 어깨 위로 내렸다. 붉은 눈이었다. 얼굴들은 일 헤르츠씩 주저앉는 어깨를 맞대고 서로에게 호흡을 쌓았다. 파스칼은 시간을 가로질러 가려 했다. 얼굴들은 입을 모아 실패한 공작을 이야기했다. 파스칼, 얼굴들에게 남은 건 단 한 번의 기회뿐이야. 기지는 황홀하게 황폐해졌다. 얼굴들은 기지의 핵심으로 모였다. 얼굴들은 융합되고 폭발했다. 백과 흑. 바다에 구멍이 뚫렸다. 기지는 기지로 기지로 기지로 기지를 넓힌다. 기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섬으로 뻗어왔다. 바다는 역동적으로 벌어지고 닫혔다. 파스칼은 최첨단의 불안을 안고 단단한 바위 해변의 입구에 당도했다. 붉은발말똥게들이 달빛을 생포한 집게다리를 사납게 쳐들고 줄지어 좌로 좌로 이동 중이었다. 파스칼은 해변의 끝에 있는 미래의 기지를 향해 dp5를 움직였다. 과거에 찍힌 파스칼의 발자국들이 점점 더 선연해졌다.

 

* * *

 

미래라는 뜻의 이 제목에 시인은 각주를 하나 달아놓았습니다. '윌리엄 바신스키의 음악.'(http://www.youtube.com/watch?v=zFWme9D6LkQ) 그의 음악을 들으며 읽으라는 뜻인가 봐요. 바신스키는 미국의 유명한 아방가르드 작곡가인데요. 배경음악을 뜻하는 엠비언트 음악으로 유명합니다. 이 음악은 단순한 리듬과 반복적인 멜로디를 들려주며 명상을 권유하는 것이라네요. 그의 음악을 틀어놓으니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철학자 파스칼의 말이 떠오릅니다. 시는 성적 몽상과 문명의 묵시록적 미래를 뒤섞으며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것 같아요. 모호한 시를 반복해 읽으며,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들의 명석판명한 주장과 그들이 멸종시키려는 세계에 대해서 사유해달라는 시인의 전언을 듣습니다. 모처럼 생각하는 갈대로서!


진은영 시인
(한국일보. 2012. 3. 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Segyo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TEL. 02-3143-2902 FAX. 02-3143-2903 E-Mail. segyo@segyo.org
04004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로12길 7 (서교동 475-34) 창비서교빌딩 2층 (사)세교연구소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