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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 <‘일본문화’ 연구>, 혹은 <일본 ‘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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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29 14:43 조회24,2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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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연구>, 이번 학기에 담당한 과목명이다. 첫 시간, 수강생들에게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일본문화’ 연구와 일본 ‘문화연구’의 차이가 무엇인 것 같냐고. 모두 첫 시간부터 왠 말장난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 침묵을 뚫고 한 학생이 말했다. ‘일본문화’ 연구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는 것이고, 일본 ‘문화연구’는 일본에서 하는 문화연구라고. 수강생들로부터 나온 단 하나의 답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일본문화’ 연구와 일본 ‘문화연구’라는 말장난 비슷한 구분을 한 까닭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한국에서도 여전히 강한 경향을 보이는 ‘본질주의’적 일본연구를 비판하기 위함이었기에 그렇다. 강의에서는 이 본질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 위주의 사고방식을 상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일본‘을’ 연구하든 일본‘에서’ 연구하든 ‘일본’을 단일한 실체나 범주로 설정하는 일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문화연구’는 일본연구의 국민국가 중심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하기 위해 채택한 표기법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본질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본질주의란 ‘일본’에 고유한 문화적 특질이 있다는 믿음의 총체이다. 가령 일본사람들은 속마음과 겉모습이 다르다는 ‘혼네’와 ‘다테마에’라든가, 사무라이 기질이 평화와 공존보다는 침략의 심성을 길렀다든가, 국가나 기업의 지배에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르는 순종적인 심성이라든가 하는 일본문화를 논할 때의 단골메뉴들이 본질주의의 내용물이다. 문화부장관을 지낸 고명한 학자의 ‘축소지향의 일본인’도 마찬가지 패러다임에 속하는 것이고 말이다. 본질주의 비판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퇴적되었을 일정 지역 주민들에 고유한 심성이 허구라거나 날조라고 부정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의 생활공동체에는 그들 고유의 문화적 코드나 공유된 심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광고에도 등장하는 성질 급한 한국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옆에 생활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본질주의 비판이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국민국가의 탈실체화이다. 사실 본질주의적 입장이 전제하는 오랜 생활공동체의 공유된 문화적 심성은 국민국가 단위로만 설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국가 내부에도 서로 차이나는 수많은 문화적 심성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때로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화적 공통성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국민국가와 문화적 본질주의는 결코 그 경계를 공유하지 않는다. 문화적 공통성이나 공유된 심성은 언제나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거나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연구를 지배해온 본질주의는 항상 그 경계를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와 공유해왔다. ‘섬나라 일본’이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경계가 깨끗하게 일치함을 나타내는 본질주의의 상징적 표현인 까닭이다. 이러한 국민국가와 문화적 본질주의의 중첩이 내포하는 문제점이 주변에 대한 억압임은 자주 지적되어 왔다. 일본에 대한 문화적 본질주의가 일본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질성을 억압하고 배제해 왔다는 비판은 이제 상식 수준의 의식이라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국가와 본질주의의 결합에 내장된 문제점은 주변에 대한 억압과 배제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주변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힘-폭력을 궁극에 가서는 국민국가로 환원하여 비판하는 사고방식이다. 국가 내부에, 혹은 국가들 사이의 주변적 존재에 주목하고 거기에 가해지는 폭력을 비판하는 일은 국민국가 비판이 일구어온 소중한 성과이다. 그러나 국민국가 비판은 주변을 억압하고 배제해온 폭력에 국민국가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비판을 법률적 책임의 형태로 전개하는 한계를 내포해왔다. 그것은 국민국가 비판이 궁극적으로 이뤄내야 할 탈국민국가화(사상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에 사실상 역행하는 결과를 낳는다. 주변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일삼는 폭력이 궁극적으로 국민국가‘의’ 것이라면, 결국 국민국가는 단일한 실체라는 전제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국가와 문화적 본질주의를 중첩시켰던 지배적 경향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역방향으로 복귀하는 역설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국민국가와 본질주의의 착종을 비판하는 일은 주변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야기한 폭력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는 명명의 문제로 직결된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위안부 할머니들 위령비에 성노예라는 표현이 과하다는 노다 일본총리의 담화가 있었다. 지겹지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잊었다 하면 등장하는 이런 분통터지는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비판해야 할까? 본질주의라면 혼네와 다테마에, 사무라이기질 등 일본인에 붙여진 수많은 부정적 표식을 사용할 것이고, 그럴 경우 한국 사람들의 분통을 어느 정도는 가라앉힐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와 목소리는 여전히 허공을 맴돌 것이며 그 영혼은 구천을 떠돌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분할을 전제로 해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와 목소리를 지각할 수 없기에 그렇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와 목소리에 책임을 져야 할 폭력의 당사자는 누구일까? 일본정부? 한국정부? 아니면 위안부를 모집한 민간업체? 아니면 남성 전체? 아니면 가부장적 군사주의?


어느 하나를 지목하더라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목소리에 응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본 정부는 이미 1965년 한일협정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법적 책임을 벗어난 상태이고, 한국 정부는 이 면책 과정에 파트너로 동참한 파렴치한 조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한국이라는 국민국가적 구분이 어떻게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달래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내셔널리즘적 감정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상처를 덧내고 목소리를 소음 속으로 흩으러버리기 일수이다. 가부장적 군사주의를 규탄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가부장적 군사주의는 이 경우 책임 소재를 묻지 못하는, 의식이나 태도의 문제로 쟁점을 흐리는 데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와 목소리는 무엇을 통해 치유되고 응답될 수 있는 것일까?


일본 ‘문화연구’는 바로 이런 문제를 고민하려는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를 보듬고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상처내고 목소리를 지우려는 폭력을 적극적으로 명명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명명 행위를 한번으로 끝내지 않고 되풀이해야만 한다. 즉 이 폭력을 국민국가나 문화적 본질주의로 환원시키는 일 없이, 다시 말해 이 폭력의 명명을 국민국가로의 환원으로부터 해방시켜, 셀 수 없는 구체적 이름들로 확산시키는 일이다. 슬프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애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머지않아 이들의 상처와 목소리는 어딘가의 기념관이나 문서기록소에 관람객이나 자료조사자를 기다리며 ‘안치’될 것이다. 그러나 기념관이나 문서기록소는 역사학을 위한 장소일지는 몰라도 역사의 현장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처와 목소리를 역사학의 장소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 머무르게 하는 일, 그것은 저 가공할만한 폭력에 대한 명명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될 것이다. 환원 없는 명명, 이 허무한 듯 보이는 실천만이 ‘일본’이란 이름의 망령을 ‘동아시아’라는 방법으로 비판하고 추적하는 유일한 길이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서남통신. 2012.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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