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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정치는 국민의 행복을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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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27 11:28 조회21,6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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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가 눈앞에 다가온 요즘 제임스 길리건(James Gilligan)의 책『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이희재 옮김, 교양인 2012)는 그 제목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책의 제목만 보면 저자가 정치학자인 줄 짐작하기 쉽지만, 실은 그는 1966년부터 2000년까지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지냈고 지금도 뉴욕대 정신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정신의학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난 40년 동안 감옥을 내 사회심리학 실험실”(p.179)로 삼았다는 말에서 보듯 폭동·인질극·살인·자살 등 폭력이 난무하는 미국 교도소에서 폭력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거둔 그 방면 권위자의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정치에 대해 발언하게 되었는가.

길리건은 수십 년간의 체험을 통해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고질적인 폭력문제를 해결하려면 재소자를 둘러싼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해결을 위한 노력의 일관된 원칙이 재소자들을 존중하고 또 그들에게도 타인을 존중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재소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비폭력적 수단 즉 교육과 일거리를 제공하는 사업을 지속함으로써 길리건과 그의 동료들은 1970년대에 600명 수감자가 있는 매사추세츠 주의 한 교도소에서 매달 한 건의 살인과 6주에 한 명꼴의 자살자가 나오던 상태로부터 1980년대 중반에는 12,000명 전체 수감자 가운데 1년간 단 한 명의 폭력치사자도 나오지 않는 놀라운 수준까지 상황을 개선할 수 있었다.(길리건은 살인과 자살을 합쳐 ‘폭력치사’라 부른다) 내 생각에는 길리건의 이런 실천적 경험이 그에게 정신의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정치사회적 시야를 열어주었을 것이다.

길리건 자신은 자기 책에 “이론적 틀과 영감을 주고 이 책의 기본전제가 되는 수많은 통찰을 제시한 사람”(p.224)이 19세기의 위대한 독일의사 루돌프 피르호(Rudolph Virchow, 1821~1902)였다고 고백하면서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 나는 피르호는 물론이고 길리건도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라는 제목의 시의성에 끌려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길리건에 의하면 피르호는 세포병리학·공중보건·예방의학·사회의학 같은 전문분야의 토대를 마련한 주역 중의 한 명이었고 인류학의 개척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1848년의 3월혁명에 참여한 투사였고 비스마르크에 대항한 진보정치가로서도 역할이 컸다고 한다. 피르호는 약으로 개별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전염병을 없앨 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여건을 개선하는 정책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논문에 썼는데, 이 결론은 자신이 이 책에서 전하려는 내용과 동일한 것이라고 길리건은 말한다. 

미국에서는 1900년부터 매년 국립보건통계원이 ‘인구동태통계자료’를 낸다고 한다. 첫해에는 뉴잉글랜드 지역 10개주에서만 자료를 뽑다가 차츰 다른 주들을 추가해서 1933부터는 48개주 모두를 다루게 되었다. 길리건은 통계가 시작된 1900년부터 이 책의 저술을 위해 자료이용이 가능한 2007년까지 108년 동안의 폭력치사 통계를 검토하던 중 뜻밖의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살인과 자살은 통념상 아주 다르다고 여겨지는데, 그가 검토한 통계는 살인율과 자살률이 늘 동반상승, 동반 하강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살인과 자살의 연관성, 즉 한쪽을 끌어올리는 어떤 원인이 동시에 다른 쪽도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살인율과 자살률이 그가 검토한 백여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큰 규모로 상승하고 극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뚜렷이 나타냈는데, 이유를 몰라 끙끙 앓다가 우연히 폭력치사의 증감이 대통령 선거주기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간단히 말하면 “자살과 타살은 공화당이 백악관에 있을 때 늘어났고 민주당이 백악관에 있을 때 줄어들었으며 그 규모와 일관성은 우연의 탓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처음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였다.”(p.18)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화당 집권기인 1900년부터 1912년 사이에 폭력치사 발생률은 10만 명당 15.6명에서 21.9명으로 증가한다. 1913년 취임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대에는 살인과 자살이 점차 줄어 1920년에 17.4명이 된다. 그러나 공화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1921년부터 다시 상황이 역전되어 폭력치사 발생률은 1929년에 22.3명으로 되고 1932년에는 26.5명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런 추세는 1933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반전되어 비교적 낮은 치사율이 1968년까지 지속된다. 즉, 1933년 26.5명이던 폭력치사 발생률이 꾸준히 떨어져 1941년 18.8명으로 되고 그 후 사반세기 동안 18명 수준을 넘지 않는 것이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는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는데, 그는 재임중 폭력치사 발생률이 올라가지 않은 유일한 공화당 대통령이다.) 그러다가 1969년 공화당의 닉슨이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폭력치사 발생률은 20세기 들어 세 번째 상승기를 향해 빠르게 치솟기 시작하여 1970년 19.9명, 1975년 23.2명, 1992년 22.4명 수준을 유지한다.(1977년부터 1980년까지 재임한 지미 카터는 폭력치사 발생률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유일한 민주당 대통령이다.) 1993년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취임하자 폭력치사는 다시 가파르게 줄기 시작하여 1997년에 18.3명, 2000년에 16명으로 떨어지는데, 2001년 공화당의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사망률은 다시 오름세로 돌아서 2007년 현재 17.2명이 되었다.

10만 명당 치사율 1명 증감이란 오늘의 미국 인구로 따져 대략 3,000명의 사람들이 살인과 자살로 더 죽거나 덜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폭력치사 발생률은 공화당 집권기에는 증가 일변도였고 민주당 집권기에는 감소 일변도였으며, 세계대전이나 대공황 같은 역사적 격변도 의외로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 즉 경제적 양극화와 살인율 간의 상관관계, 특히 직장의 유무와 폭력범죄와의 상관관계에 관한 그 방면 전문가들의 기존연구를 인용한다. 가령, 1900년부터 1970년 사이의 방대한 통계자료를 분석해 “자살률과 살인율은 상호간에 연관성이 있을 뿐 아니라 실업률과도 상호연관성이 있다”(p.65)고 하는 홀링거(Paul Holinger)의 연구라든가, 직장이 있는 흑인남자와 백인남자의 폭력범죄에 관여하는 비율을 검토하여 “폭력행동의 인종별 차이를 만들어내는 주된 원인은 실업이다”(p.66)라는 결론에 이른 윌슨(William Julius Wilson)의 견해를 길리건은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길리건은 다음과 같은 의문에 부딪친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수집에 나서기 전만 하더라도 나는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 높은 소득세, 높은 자본이득세, 높은 법인세, 높은 상속세와 과도한 규제로 경제성장을 질식시키는 민주당과 달리 자기네 정당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정당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고(중략) 미국인의 통념은 경제성장을 원하면 공화당을 찍어야 하고, 민주당은 성장의 숨통을 막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랬을까.(p.79~80)

그러나 공화당의 선전과 달리, 그리고 다수 미국인들의 선입견과 달리 실제로 ① 불황은 공화당 정부 때에 민주당 때보다 3배 더 자주 시작되어 45% 더 오래 갔고, ② 공화당이 다음 정권에 불황을 유산으로 넘길 확률이 민주당보다 4배 더 높으며, ③ 민주당 집권기에 일어난 불황의 3분의 1은 공화당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그러고 보면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나 2008년 시작된 금융위기나 모두 공화당시대의 유산이다.) 그런가 하면 국민총생산의 개념이 처음 도입된 1948년부터 2005년 사이에 1인당 실질 국민총생산은 공화당 집권기에 1.64% 늘어난 반면에 민주당 집권기에는 2.78% 늘었다. 다시 말하면 민주당 집권기의 경제성장률은 공화당 때보다 70% 더 높았다. 그런데 문제는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경제에 더 무능하고 따라서 살인·자살 같은 사회적 불안요인을 더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는 경제문제와 치안문제가 늘 공화당에 더 유리한 무기로 작용해왔다는 사실이다.

수수께끼는 바로 이것이다. 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p.98)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수법으로 이용된 이 전략을 로마 황제들은 ‘분할통치’라 불렀는데, 그것은 전형적으로 미국 공화당의 전략이기도 하다.(번역서는 ‘분할정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문맥상 ‘정복’보다 ‘통치’가 더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폭력과 범죄율이 높아질수록 중산층과 저소득층은 누가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진짜 범인인지 직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들끼리 증오하고 농락당하여 자기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하기 일쑤다. 따라서 공화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공화당이 빈곤을 줄이는 데 실패하고 폭력과 범죄를 줄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p.108). 즉, 빈곤과 범죄야말로 지배계급의 자산이며 공화당 승리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그들 자신도 이 점을 잘 의식하고 있어서, 가령 1964년 배리 골드워터의 선거본부장은 범죄가 “공화당에 공짜로 주어진 억만금의 선물”이라고 말했고, 아버지 부시의 선거참모는 “범죄는 민주당을 쪼개놓기 위해 민주당에 박아 넣어야 할 쐐기”라고 말했다.(p.105)

마지막에 길리건은 다시 의사의 직분으로 돌아온다. 의학은 원래 가치판단을 하는 직업이 아니지만, 유일하게 예외가 있다면 의학의 존재이유이기도 한 인간생명의 가치 또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할 때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폭력치사인데, 그것을 제대로 다루자면 폭력치사가 발생하게 되는 심리적·사회적·정치적 여건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배울 기회와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맛보는 수치심을 해소할 수단으로 오직 폭력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따라서 교육과 취업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 해결책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오늘의 미국 주류사회와 대조되는 두 개의 사례를 거론하고 있다. 첫 번째 사례는 미국 북서부와 캐나다 남부에서 작은 농업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재세례파의 한 종파인 후터라이트(Hutterite)이다. 그들이 1875년경 동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건너온 이후 109년 동안 그들 사회에서는 단 한 건의 살인도 일어나지 않았고 자살만 딱 한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을 산다고 자처하면서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p.138) 다른 하나의 사례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내지 복지국가 모델이다. 미국 공화당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빈곤과 공산독재로 가는 방향이라고 비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델에서는 “빈곤율·무주택율·살인율·수감률이 미국보다 훨씬 낮고 극형이 없고 평균수명이 더 길고 여가를 더 누리고 유아와 산모의 사망률과 발병률이 낮고 양질의 탁아와 보건 서비스, 고등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하면서도 미국 국민이 누리는 것보다 더 큰 경제적 안전을 국민에게 제공”(p.202~3)하는 기적을 이루어내고 있다.

유럽의 복지국가와 비교된 미국의 현실을 좀 더 실감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책들을 함께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부키 2011)는 시카고에서 노동전문 변호사로 눈코 뜰새없이 일하던 저자가 우연한 기회에 두 달 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미국에 비할 때 독일이야말로 ‘천국’임을 발견하게 된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오! 당신들의 나라』(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부키 2011)는 미국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성·인종·계급·소득·재산에 따른 엄청난 차별을 신랄하게 풍자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칼럼집이다.미국을 닮은 어떤 나라』(데일 마하리지 지음, 마이클 윌리엄슨 사진, 김훈 옮김, 여름언덕 2012)는 르포전문 기자와 사진작가인 두 저자가 한 팀이 되어 198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30년 동안 몰락하는 미국 노동계급과 그들의 후예인 노숙자와 유랑빈민(hobo)들 속으로 들어가 때로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듣고 보고 겪은 일종의 기록문학이다. 오늘의 미국 현실을 암울하게 묘사한 더 많은 책들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이 저서들이 모두 다름 아닌 미국인 자신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다산포럼, <이달의 책>. 201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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