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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멀기만 한 ‘에너지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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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20 23:18 조회21,1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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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사고 1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탈원전,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결론은 어려우리라는 것이다. 독일의 시인 볼프 비어만은 희망을 떠들어대는 자는 사기꾼,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개자식이라고 노래했지만, 희망의 싹은 좀체 발견되지 않는다. 에너지 전환 과정이 지난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에너지 전환의 기본 토양이 마련되지도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탈원전,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려면 첫째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어야 한다. 동시에 재생가능 에너지의 이용이 늘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 둘의 달성을 위해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정치인들도 여기에 가세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희망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지난 1년간 석유 수입은 원유 가격이 그 전해에 비해 40% 가까이 상승했음에도 6.2%나 증가했다. 에너지 소비는 3.2%가량 늘었다. 전력 소비는 9.4% 증가했다. 주택의 전력 소비도 전체 증가율보다는 낮지만 6%가량 늘었다.


반면에 재생가능 에너지가 전체 전력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형 수력발전과 폐기물발전까지 모두 끌어모아도 2%가 안된다. 지난 10여년 동안 조금도 늘지 않았다. 정부의 녹색성장 정책에 힘입어 태양광발전소가 크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전력 소비 증가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재생에너지 확대 효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시민들의 움직임도 아직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원전 반대 시위에 모이는 사람도 수십명에서 수백명 정도다. 에너지 전환을 직접 실천하는 시민이 있기는 하지만 숨어 있는 것 같고, 반핵의 목소리만 가끔 크게 들린다.


야권 정치인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원자력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더니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탈원전, 에너지 전환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다. 오히려 민주통합당에서는 원자력 찬성자들이 상당수 출마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원자력발전 주무부처 장관을 하면서 원자력 확대를 거들던 사람이 단독후보로 정해졌다. 참여정부 때부터 지금까지 재생가능 에너지 확대를 위해서 노력했던 예비후보에게는 경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총리를 지낸 민주당 대표는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다시 정권을 잡으면 참여정부 때처럼 대안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야당 정치인들이 정권을 쥐면 생각이 바뀌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에너지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중대한 책무를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빠르게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고 대안에 대한 확신이 없는 정치인이라면 원자력 앞에 금세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말만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에 대한 신념을 기르고 정교한 대안을 공부하는 것이다. 무역의존도가 90%에 달하는 우리나라는 어쩌면 에너지 소비를 끊임없이 늘려가고 그것을 원자력으로 충당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지 모른다. 1인당 국민소득을 높이려면 수출을 계속 늘려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해마다 에너지를 더 많이 수입해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한 길은 둘밖에 없어 보인다. 하나는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1인당 국민소득 높이기를 그만하는 것이다. 첫번째 길을 위해서는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두번째 길을 위해서는 새로운 행복지수를 도입하고 국민총생산(GDP) 성장이 아니라 이 행복지수를 높이려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원전 폐기를 언급하는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공부 끝에 그것이 우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더라도. 만일 그런 정치인이 우리 동네에 와서 자기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원자력발전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고백한다면, 나는 그에게 한 표를 던질 용의가 있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2.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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