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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숙] ‘왕언니’들의 살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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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1-18 10:50 조회17,6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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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계에는 ‘왕언니’ 세 명이 있다. 그들은 대표나 이사장보다 왕언니라 불러줄 때 더 행복하다. 수십년간 여성운동 안에서 각기 환경·평화·문화의 영역을 개척하고 이끌면서 큰 발자국을 남긴 언니들은 최근에 셋이 되어 등장했다. 혼자일 때보다 셋으로 움직일 때 왕언니들의 행보는 더욱 유쾌하고 당당하다. 지장·덕장·용장의 환상 조합이라 자칭하는 그들이 앉으면 몇 시간씩 풀어내는 수다와 박장대소는 천장을 뚫을 것 같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구상해 쏟아내는 박영숙 큰언니, 두서없이 얽혀버린 왕수다를 조각보 꿰매듯이 조리있게 정리해주는 이현숙 중간언니, 뭐든 일단 해보자고 바람잡는 막내언니 박옥희 등 다른 색깔을 가진 그들의 손발은 척척 맞는다. 무대든 밥상이든 어디서나 언니들의 이야기는 놀라운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뿜어낸다.

 

수다 메뉴는 여성정치, 가난한 아시아 여성들과 연대하기, 일하는 딸 대신 손녀딸 키우는 ‘앵그리 그랜맘’(화난 할머니)에 대한 정책, 여성운동의 진로까지 무궁무진하다. 그들의 싱싱한 ‘현역정신’에 상상력과 낙천성이 버무려지면서 상 위에 올라온 모든 수다는 놀랄 만한 프로젝트로 환생한다.

 

팔순의 큰언니는 두달 전 네팔 10대 싱글맘을 돕는 단체 ‘두런두런’을 창립해 후배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중간언니는 책을 쓰고 있다. 그들은 어떤 일에서도 근엄하거나 심각하지 않으며,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다.

 

2010년 말 여성계 송년회를 주관한 그들은 가득 모인 후배들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풍성하게 대접했다. 모두들 넉넉히 배불러갈 즈음, 다가오는 정치의 해를 맞아 함께 정치의 새판짜기에 나서자고, 자신들은 거름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주저하며 한발 빼고 싶은 후배들을 불러 모아 다독이고 재촉한 지 몇 달 만에 ‘살림정치 여성행동’이 조직되었다. 왕언니들의 내공 찬 경험과 열정적인 풍구질 덕에 ‘돌보는 정치, 나누는 정치, 살리는 정치’의 꿈은 첫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돌봄·나눔·살림’의 가치는 현실정치를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숙덕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것이다. 그동안 정치가 그런 가치를 고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실, 살림정치는 처음부터 구태정치에 맞장구치기를 거부하며 탄생했다. 오래된 주류정치의 언어와 관습을 뛰어넘으려 했으니, 당연히 계파나 줄서기는 없다. 막무가내식 비난과 음모는 절대 사절이다. 여성 몇 명을 더 국회에 보내는 것에 큰 초점을 두었던 이전의 전략에서 새로운 가치로 정치의 문법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 목표다. 현실을 넘어서려는 의지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언어는 낯설고, 때론 고단하지만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 아닌가.

 

19세기에 본격화된 서구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한 세기 동안 각국에서 많은 여성들이 손가락질당하고 고초를 당한 끝에 제도화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고 겨우 0.9%이던 여성 지방의원은 20년이 지난 지금 20%에 다가섰다.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장은 아니어도 살림정치의 가치는 현실정치의 중심으로 조금씩 스며들 것이다.

 

그녀들은 말한다. 자신들은 앞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기운을 북돋아 주겠다고, 필요하면 음식도 만들고 자리도 마련하며 누구든 만날 것이라고 한다. 살림의 정치문화가 연착륙하려면 그것을 만드는 과정도 사람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들처럼 내가 먼저 빛나겠다는 마음을 접는다면, 내가 뿌린 씨가 맺은 열매를 내가 따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이 된다면 새로운 정치는 가능하지 않을까. 왕언니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윤정숙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한겨레. 201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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