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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좋은 정치인,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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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1-09 07:25 조회18,2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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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태형. 1980년대 학생운동을 거친 우리는 나이 차이가 20년에 가깝지만 그를 근태형이라 불렀다. 선배들이 사용하는 호칭이 그대로 우리의 입에 붙었던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호칭에 대해 고인은 당신 후배들에게는 꼬박꼬박 선생님 대접을 하면서 자신에게는 형으로밖에 대접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형이라는 호칭은 그가 정치권에 들어간 이후 의원, 장관, 의장 등을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사회관습으로는 어색했던 형이라는 호칭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투쟁의 현장을 지켰던 그에게 수여된 훈장이었다. 그 호칭이 사라진 뒤에도 형과 동생으로 맺어진 정서적 유대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되었다. 우리가 그를 보내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정은 조문과 장례식을 거치며 이미 여러 사람들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쉽게 내려놓기 어려운 마음의 짐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고인의 숭고한 뜻과 작금의 정치, 사회적 현실 사이의 낙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근태형’과 우리, 적어도 필자와의 인연이 그리 순탄했다고만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갚을 길이 없는 마음의 부채가 되었다.

 

세대를 뛰어넘은 끈끈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근태의 정치를 힘을 다해 지원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고인의 정치역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이다. 물론 고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그의 가까운 벗이 되어주었던 사람도 있지만,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회한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우리보다 김근태와 더 가까운 세대에게도 이러한 회한이 없을 리 없다. 왜 이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그것이 최근 며칠 동안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이었다.

 

이 물음에 대해 얻는 답 중 하나는 그가 좋은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좋은 정치인이라는 점이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어렵게 만든 역설이 우리의 정치현실이자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지연과 같은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자산에 의존해 정치를 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주장에는 그가 경기도 출신으로 이렇다 할 지연을 갖기 어려웠다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몇년 전 필자와의 개인적인 자리에서 고인은 국민의정부 출범을 전후로 동교동계 실세로부터 자신과 힘을 합쳐 정치를 이끌어가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유혹적이었지만 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정치권에서 김근태만한 개혁과 상징성을 갖는 정치인이 드물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인은 낡은 방식의 정치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결심에 이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쳤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적 결과는 가혹했다. 지역이라는 뿌리가 약한 정치인은 큰판의 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고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알게 모르게 김근태에 대한 기대감도 약해졌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사실은 좋은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정치에서 선명하고 환상적인 구호들이 얼마나 난무해왔는가? 그러나 이러한 선명한 구호들이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되기보다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 정치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은 그리 선명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는 용기의 부족이 아니었다. 누가 가장 엄혹한 시절을 칼날이 되어 맞섰던 김근태에게 용기의 부족을 말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고민을 함께하기보다는 조바심을 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 조바심은 우리와 그 사이에 또 다른 벽을 만들었다.

 

지금도 좋은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선거의 해, 그리고 역사적 전환점에서 김근태가 우리에게 남긴 무거운 숙제이다.

 

이 숙제를 해결할 때 고인도 하늘에서 모자란 동생들을 용서하고 환하게 웃을 것이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국학
(경향신문. 201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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