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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동방의 빛’을 찾는 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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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1-04 10:37 조회18,6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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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미국이 앞장서고 국제금융자본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종언을 고했다.

 

위기는 월가의 도덕적·경제적 파탄을 만천하에 드러냈으며, 고삐 풀린 금융 세계화의 위험성을 웅변으로 증명했다. 물론 미국, 금융자본, 신자유주의의 세력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은 아니며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직 새로운 정치적 주체와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신자유주의가 새롭게 소생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선진 각국에서 재정위기와 사회정치적 위기가 계속되는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한 그람시의 말이 더없이 적확한 상황이다.

 
세계경제를 옥죄고 있는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그리고 그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양극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경제체제를 수립해야만 한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근본적 개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새 시대를 향한 핵심적 요구는 경제민주화다. 1%를 위해 99%를 희생시키는 경제체제를 거부하고, 이제 경제는 99%를 위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논리 못지않게 민주주의가 중요하고, 자유 못지않게 평등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시장의 도구가 되어선 아니되며, 시장이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화도 무조건 강요하고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공공복리의 증진에 도움이 되도록 규제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월가 점령 시위’에 담긴 시대정신이고, ‘한·미 FTA 반대 촛불집회’에서 타오르는 대중의 요구인 것이다.

 

새 시대는 더 이상 미국 주도, 미국 헤게모니의 시대가 아니다. 세계경제의 중심은 빠르게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규모는 이미 미국이나 유럽연합을 능가했으며, 불과 5년 후면 구매력 기준으로 중국 경제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제전망은 비관적인데 동아시아 지역은 역동적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고도성장이 수십년간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도 “중국은 국유기업 구조조정을 못해서, 금융부실 때문에 망한다” 혹은 “중국은 소득불평등으로 정치불안이 야기되어 망한다”고 바람 섞인 예측을 해대던 서구의 경제전문가들은 정작 미국과 유럽의 경제가 바로 그런 문제들로 자멸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넘어왔다고 해서 동아시아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나름대로 심각한 사회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경제상황은 상이할지라도 양극화 문제는 각국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최대 현안이다. 일본은 이 때문에 이미 2009년에 50여년 자민당 정권이 막을 내렸고, 눈앞에 닥친 대만 총통선거나 내년의 한국 총선과 대선에서도 양극화는 최대 이슈로 부각될 것이다. 중국의 농민시위나 반부패시위도 양극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어서 금년에 출범할 제5세대 지도부에게도 최대 현안은 양극화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세계경제의 모순과 동아시아 지역의 고민을 고스란히, 어쩌면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한 세대 남짓한 기간에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까지 올라섰지만, 그 후로는 금융 세계화의 쓴맛과 양극화의 어두움으로 상당 부분 퇴색하고 말았다. 한국 국민은, 경제는 성장하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데 삶의 질은 하락하고 행복은 멀어져가는 역설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 한국 역사는 세계사의 중심부에 단군 이래 가장 가까이 다가갔는데 삼포세대라고 자조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희망과 기백을 잃어가고 있다. 세계 최하의 초저출산율로 민족의 집단자살을 꾀하고 있는 형국이다.

 

모순이 극에 달한 만큼 변화의 기운도 강한 것이 한국의 상황이다. 외세의 침탈과 식민지배, 동족상잔과 군사독재 등 모진 시련이 이어진 역사의 질곡을 뚫고 나온 민족의 저력은 이제 새 시대를 여는 동력이 될 것이다.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 아래 새로운 정치주체의 결집을 이뤄내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 인본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사회경제체제를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이 동아시아 정치 변화의 물결을 이끌고 사회통합적인 지역경제통합을 주도하며, 나아가 지구촌의 공생발전과 생태계 보전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이 세계를 밝게 비추는 ‘동방의 빛’이 되기를 바란다.

 

한민족의 저력을 새 시대의 동력으로 만들고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정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2012년, 한국 정치는 참으로 중차대한 역사적 임무 앞에 서 있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2012.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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