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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분출하는 인권불만을 떠받들고 의제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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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1-02 10:07 조회18,6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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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권 연구에 의미심장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일단의 사회학자들이 ‘인권 사회학’이라는 지붕 아래서 인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민주화 이래 주목할 만한 변화 중 인권 의제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를 돌이켜 봐도 ‘희망버스’로부터 ‘도가니’ 사건에 이르기까지, 무상급식으로부터 국가보안법 논쟁에 이르기까지 인권과 동떨어진 사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인권의 이름으로 사회적 의제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권 연구는 전통적 패러다임 내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도 우리는 법규범 위반을 중심으로 인권침해를 규정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어떻게 해결할지 주로 고민한다. 또는 인권 원칙을 나열한 조례나 헌장을 만들어 인권을 신성한 규범의 자리에 ‘모시려’ 한다. 인권이라는 ‘절대반지’의 잣대에 비춰 현실을 평가하거나 개선하려는 것이다. 일종의 연역적 방식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방식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접근만으로 인권 담론의 확산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인권 사회학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시민들은 왜 인권을 제각기 다르게 이해하는가? 이른바 ‘객관적’인 인권지수와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인권’ 사이의 온도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회발전 정도에 따라 대중이 인권 우선순위를 다른 식으로 정하는 것이 정치에 어떤 교훈을 주는가? 인권에 있어 대중여론이란 어떤 의미일까? 또는 여론으로 인권을 파악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권의 원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까? 이런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권을 둘러싼 태도와 인식을 정교하게 파악할 수 있다. 사회학의 주특기인 경험적이고 귀납적인 방식으로 인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이런 접근이 필요한가? 절대반지로 평가해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것이지, 사람들이 인권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사람들의 인권 인식과 의식이 인권의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인권의제를 여론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어떤 이슈가 인권의제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논쟁이 정확히 이런 점을 보여 주었다. 무상급식 이슈는 규범적으로 인권을 파악하는 쪽에서 보면 문제가 될 수도 없는 상식적인 사안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주민의 ‘여론들’이 충돌하는 정치과정 속에서 판가름이 났다. 그러므로 사회학적으로 인권을 연구한다는 말은 천부인권 개념을 넘어, 인권이 특정한 역사와 상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합의의 산물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한 흥미로운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2005년부터 올해까지 한국인의 인권의식과 경험을 추적한 논문이 있다. 우선 지난 6년 동안 시민들의 인권 인지도와 차별 경험에 대한 민감성이 모두 늘어났다. 시민들이 인권을 많이 알게 되었고 비판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권의식이 늘어난 것과는 달리 인권을 개인 차원에서 실제로 실천하는 헌신성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했다. 또한 정치적 성향과 인권의식 사이에 뚜렷한 관계가 있었다. 진보 성향일수록 인권을 중시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인권 이슈들, 즉 경제적 문제나 새로운 차별문제로 관심이 확장되는 경향이 관찰되었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적 권위, 국가안보와 같은 구시대적 가치와 새롭게 대두된 인권가치 사이의 충돌이 뚜렷이 드러났다.

 

이 중에서 인권 인지도의 증가와 차별 경험에 대한 민감성의 증가가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결론이 관심을 끈다. 인권의식이 늘어날수록 인권상황에 대한 비판도 늘어나고 그 결과 상황을 더욱 비관적으로 보게 되는가? 즉 인권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의식하고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인권상황에 대한 평가가 더 엄격해지는가? 또는 객관적인 인권상황은 국제적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은 편인데 우리의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에 현실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생기는가? 필자는 이 문제에 답할 수 있으면 인권의 역설적 특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권은 민주주의의 두 가지 축, 그러니까 다수결제와 대의제를 통해 집단의 문제를 위로 걸러 올리는 수직적 정책 여과의 차원, 그리고 소수의 요구를 발굴하고 권력집중을 희석시키려는 수평적 평등 확산의 차원을 모두 반영한다. 전자는 집단의 문제를 관리가능한 형태와 수준에서 제도화하려는 경향을 대표한다. 후자는 인간의 평등성을 말 그대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이상주의적 열망을 대변한다. 인권은 두 차원이 만나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발전한다. 수많은 인권문제들이 제도화를 통해 정책적으로 여과될수록 그것으로부터 배제되는 새로운 집단과 개인이 계속 ‘발견’된다. 따라서 인권문제의 최종적 해결이란 원래 불가능하다. 새로운 인권비판이 나타나고 새로운 인권문제가 자꾸 출현하는 것 자체가 인권의 발전을 역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를 실천할수록 ‘새로운 불만의 사이클’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런 불만을 이끄는 힘이 바로 인간평등을 향한 인권의 수평적 요구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사람들 머릿속에서 새로운 불만을 상상하게 하는 영원한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애정남 식으로 말하자면 이 불만을 억누르면 보수고 떠받들면 진보다. 인권 사회학의 궁극적인 과업은 이 새로운 불만을 예민하게 찾아내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년이면 두 차례 핵심 선거가 있다. 누적된 불만의 사이클을 새로운 차원의 사이클로 대체할 때가 되었다. 대중의 까다로워진 인권의식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 201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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