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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운] 온고지신 : 다시 떠오르는 각축장,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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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2-09 11:59 조회18,3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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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벽두, 근대 중국의 계몽사상가 량 치차오(梁啓超)는 8개월간의 미대륙 장정을 위해 태평양행 배에 올랐다. 1903년 봄, 캐나다 벤쿠버 항에 도착한 그를 기다린 것은 미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태평양 연안도시 순방 소식이었다. ‘태평양연설’이라 불리는 이 순회연설에서 루즈벨트는 세계 문명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을 거쳐 바야흐로 태평양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었다. 또한, 같은 해 7월 독립기념일 행사는 태평양 해전(海電)의 완성을 경축하는 열기로 떠들썩했다. 드디어 대서양(유럽)을 거치지 않고 동아시아와의 직접 교통을 가능케 한 이 사건을, 뉴욕 <태양보>는 “동방에서 미국의 세력이 비로소 공고해졌다”며 대서특필했다(梁啓超, 『新大陸遊記』 1903). 이것이 량 치차오가 미국 여행에서 받은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문명의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향한다는 것은 세계의 패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임을, 그는 날카롭게 간파했던 것이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이 다시 동아시아로의 귀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8개국과의 환태평양경제동반협정(TPP)의 추진,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남중국해 문제의 제기, 호주 군사 주둔 등 일련의 기습적 연쇄 공세에 중국이 한 방 먹었다는 게 지금의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특히, 중국이 그간 일관되게 당사자 국가간 해결을 주장해온 남중국해 이슈를 미국이 EAS의 의제로 제기하자, 동아시아 지역 내 중국의 위신이 추락했다, 주도권이 미국으로 옮겨간 것 아니냐는 해석들이 들끓고 있다. 심지어 TPP 가입을 비롯하여 미국의 아시아 귀환에 선봉장 역할을 한 일본에, 중국이 자세를 낮춰 환심을 구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하지만 정작 중국은 느긋하다. 원 자바오 총리는 이번 회의에서 아세안 국가들과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자유무역 및 상호교류 확대에 합의하는 등 성공적인 수확을 얻었다고 자평했다. 중국 신화(新華)통신에 따르면, 원 총리는 회의에 참석한 각국 수뇌들과의 회담에서 “단결, 발전, 협력”을 모토로 하는 “동아시아 협력 프레임”을 기반으로 역내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추진하자는 데 상호간의 결의를 다졌다. 그러면서도 남중국해 문제로 중국이 역내에서 고립된 게 아니냐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당사자 국가간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강조하며 적절히 에둘렀다.

 

물론, 중국 내에도 미국에 대한 비난과 더불어 위기를 감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그 중 눈여겨 볼 것은, 9.11 이후 중국이 누려온 “전략적 기회”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는 견해이다. 지난 10여년 간 미국이 아랍권과의 반테러 싸움에 몰두하는 사이 몰라보게 성장한 중국은 뒤이은 미국의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를 틈타 세계경제의 새로운 ‘모델’로 부상했다. 경제적으로 달러화를 위협하고 이념적으로 미국의 가치에 맞서 ‘중국모델’을 주변국에 확산하려는 중국에 대해, 이제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인접국을 꼬드겨 국경을 교란하고, 중국 견제를 위해서는 베트남이나 예멘처럼 ‘보편가치’에 반하는 국가들까지 서슴없이 끌어들이는 미국의 행보에 대해, 종래 신보주의 정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실용주의라며 다소간의 비아냥을 섞고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분위기는 역시 대세를 관망하자는 쪽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귀환은 금융 개혁과 경제 재건에 실패한 오바마 정권이 재선을 앞두고 낼 수 있는 마지막 카드다. 또한 반(反)월가 시위가 보여주듯 현재 미국은 경제뿐 아니라 이념과 가치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내부 모순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기구를 동원하여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하겠느냐는 것이 중국 측 관측이다. 미국의 대중국 공세는 자기 존립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로서 여기에 동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깊은 침체에 빠진 미국경제는 중국의 거대한 시장에서 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 중국 경제에 가한 타격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미국이 과연 중국에 정면 도전을 감행하겠느냐며, 중국은 여유를 부린다. 여기에는 광대한 내수시장과 생산력, 그리고 동아시아 최대 교역 상대국인 중국이 역내에 다져온 입지를 미국이 근본적으로 어쩌기 힘들 것이라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 심지어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일본조차 대중(對中) 교역량이 대미 교역량을 훨씬 웃도는 상황 아닌가.

 

그럼에도 이번 미국의 ‘귀환’ 행보는 한동안 거침없이 질주해온 중국의 패권화에 다소간 제동을 걺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전망을 잠시 되돌아볼 공간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지구촌 시대에 공동의 평화와 번영에 기반하지 않은 자국의 실리란 허망한 욕망이다. 20세기 초 미국 유람으로부터 권력과 자본의 독점화라는 본질을 위협으로 감지했던 량 치차오는 중국 또한 강한 정부, 강한 국가를 세워 이 ‘세(勢)’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세’가 전도(顚倒)된 형태로 다시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역설적 상황이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낡은 이념적 잔재에 젖어 미중간 양자택일하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처세는 없다. 지난 세기 동아시아가 열강들의 탐욕의 각축장이었다면, 이제는 전도된 ‘세’로부터 새로운 시대의 교훈을 찾아 실리와 대의 사이에서 지혜로운 중간지대를 넓혀가는 창조적 실험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백지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서남통신. 201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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