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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조어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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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0-19 09:51 조회29,1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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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터넷 포털싸이트에서 ‘조어대’를 검색해보면 북경의 국빈관인 조어대(釣魚臺)가 나온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관심 갖는 것은 중국어권에서 ‘디아오위타이’(釣魚台列嶼, 주로 타이완과 홍콩에서 사용) 또는 ‘디아오위다오’(釣魚島) 및 그 부속도서, 일본에서는 ‘센카쿠열도’(尖閣列島)로 불리는 곳이다. 그것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약 300㎞, 타이완에서 약 200㎞ 떨어진 동중국해 남쪽에 있는 무인도인데, 5개의 작은 섬과 3개의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명칭이 복잡한 데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듯이, 관련국끼리 갈등이 벌어지는 장소여서 인터넷에서는 영토분쟁 지역으로만 설명될 뿐이다.

 

그런데 타이완에서 ‘조어대’는 애국운동이자 계몽운동(또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기념되고 있다. 이 점은, 지난 9월 17일과 18일 이틀간 타이완 칭화대학(淸華大學)에서 열린, 조어대지키기운동(保釣運動) 40주년을 기념한 국제회의의 분위기에서 짙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1년 1월과 4월에 미국의 타이완 출신 유학생들이 뉴욕과 워싱턴에서 ‘조어대지키기운동’을 벌였고, 그 영향을 받아 6월 17일 타이완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감행했다. 그후 이 운동이 타이완에서 확산되었는데 여기에 참여한 지식청년들은 그 과정에서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에 눈 떴다. 당시는 쟝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정권이 냉전질서를 빌미로 백색공포의 통치를 펼치던 엄혹한 시대임을 떠올리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40주년을 맞은 올해 그 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 특히 활기를 띠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 당시 이 운동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지금도 관심 없기는 매한가지이지 싶다. 1971년 전후의 우리 주요 일간지를 조사해보면, 조어도는 국제문제의 단신보도 즉 타이완과 중국 대 일본의 영토분쟁으로만 간단히 다루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도 간헐적으로 되풀이되는 영토분쟁의 대상으로만 인식되는 게 고작이다. 작년 10월에 있었던 중국 어선과 일본 순시선의 충돌사건이 그 하나의 사례가 되겠다.

 

그러나 시야를 동아시아로 넓혀 다시 보면, 조어대 문제는 ‘연동하는 동아시아’의 일부이다. 그곳을 둘러싼 영토분쟁은 1895년 청일전쟁의 뒷처리 과정에서 타이완이 일본에 넘겨진 시점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제국과 식민의 문제가 아직 해결 안된 결과이나, 직접적인 분쟁은 여기에 냉전 문제까지 중첩되면서 분출했다. 즉 1971년 오끼나와 반환이 그 도화선이 되었으니, 70년대 전반 동아시아의 데땅트라는 미국이 조성한 구조적 변화가 분쟁을 촉발한 것이다. 1969년 7월 괌을 방문중인 닉슨이 공표한 닉슨독트린에서 드러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은 앞으로 미국이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할 것이며, 아시아의 방위는 기본적으로 아시아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중국과의 타협 및 일본의 역할 증대가 필요했다. 미국은 그 일환으로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장악해온 오끼나와에 대한 신탁통치를 종결하고 일본에 반환하겠다고 했으며 그에 따라 오끼나와에 포함되어 있던 조어도까지 일본에게 그대로 반환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분쟁이 유발되었던 것이다.(반환협정 1971년 6월 17일 체결, 1972년 5월 15일 발효. 이날부터 일본은 조어대를 오끼나와현의 일부로 편입시켜 실효적으로 지배중이나, 타이완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이란(宜蘭)현에 속하게 하고, 우편번호 290을 부여하였다.)

 

동아시아가 이렇듯 구조적으로는 연동되었지만 그에 대응하는 행위주체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서로 고립되어 각자의 문제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바뀌었을까. 이에 대한 긍정적 답을 칭화대학의 국제회의에서 발견했다. 이 회의의 주제가 ‘동아시아 맥락 속의 조어대’란 데서 간명히 드러난다. 올해 앞서 열린 조어대 관련 회의들과 달리 이 회의는 조어대 문제를 양국간의 영토문제란 좁은 시야에서 보지 않고, 동아시아 국면에서 넓게 봄으로써 “더 나아가 지역 안전과 이차대전 후 정의(正義)의 문제를 사고하려는 것”이다.(亞洲週刊, 2011년 10월 2일자)

 

이러한 주최측 취지에 아주 잘 부응한 것이 오끼나와에서 온 와까바야시 치요(若林千代)가 발표한 지금의 조어대/센가꾸 문제를 보는 시각이다. 그녀는 일본 (및 미국) 정부가 오끼나와를 군사기지화 하기 위해 중국위협론을 강조하나 오끼나와 주민은 중국을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라고 간주하지 않는다고 분석하고, 국가중심주의인 ‘국방’ ‘안보’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생활권이란 시각에서 영토 문제를 다시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영토 문제를 다룰 때도 누구의 시각인가가 역시 중요하다는 뜻이다.

 

토론자로 참석한 필자는 4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타이완 참석자들의 자세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71년 미국에서 벌인 운동의 리더였던 린 샤오신(林孝信)이 본래 강권운동에 저항하고 냉전질서에 반대하는 의미를 가진 운동을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동력으로 전환하자고 호소한 것이나, 젊은 세대인 왕즈밍(王智明)이 영토 문제나 민족주의에 갇혀서는 젊은이들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려우니, 영토 개발이 아닌 환경정의와 공생의 관점에서 운동의 비판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제안한 것은 필자를 포함한 청중들에게 널리 공감되었다.

 

그러면서도 필자에게는 약간의 염려도 없지 않았다. 이 운동에는 본래 애국운동과 계몽운동의 두 측면이 있었는데, 그중 애국운동의 측면이 강화될 여지도 있다. 화인세계(華人世界)의 영토에 대한 관심사로 확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4년부터 중국 대륙 청년들도 조어대 지키기에 나서고 있지 않은가.

 

또한,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조어대를 말하는 것이 당시 운동의 주역인 기성세대의 단순한 향수어린 회고담이 아니라 청년세대와 공유할 가치가 있을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청년과 함께 하려면 지역협력이든 환경정의나 공생이든 이상주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들의 정서를 동원할 동력을 (민족주의 말고) 어디에 찾을 것인가. 이것은 타이완의 비판적 지식인들만의 고민거리는 물론 아니다. 필자는 토론 자리에서 문제를 지역적으로 분석하되 각자 자기 삶의 현장에서 국가 개조작업에 참여하는 실천적 작업의 중요성을 아울러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 그것을 실감할 수 있게 해야만 그들의 지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덧붙였다.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바꾸어 역사는 과거와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40년 전을 돌아보는 이번 회의야말로 미래 프로젝트의 현실적합성을 묻는 성찰의 자리였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 / 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통신. 201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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