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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탈핵과 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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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9-29 13:30 조회19,7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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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 후 도쿄에서 1만5000명의 시민이 원자력발전 반대 시위를 벌였을 때, 일본의 원로 철학자 미시마 겐이치는 그것이 정말 보통 시민들의 시위였고, 자기도 한 사람의 보통 시민으로서 참가했다는 내용이 담긴 글을 썼다. 그는 시위의 주체는 젊은이, 아기 엄마, 휠체어 탄 노인 등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이었고, 지난 수십년간 행정과 경제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죽어있던 일본 시민사회가 이제야말로 깨어나는 것 같다고 감동어린 어조로 글을 이어간다. 

물론 그는 일본에서 반원전 그룹이 오랫동안 활동했고, 이미 수십년 전부터 후쿠시마 폭발사고를 예언한 책들이 줄을 이어서 출판됐다는 말도 덧붙인다. 원자력 산업계에서 경력쌓기를 거부하고 반원전의 기수로 행동하다가 작고한 세계적 유명인 다카기 진자부로와 그의 수십권 책에 대해서도 경이의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빠뜨리지 않는다. 수십권의 책은 자가출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반원전 행동가들은 수십년 동안 고립돼 자기들만의 ‘비밀공론장’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서로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것으로 만족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지난 11일 도쿄에서 다시 6만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여기에서도 주목받은 이들은 유명 소설가, 배우, 젊은 예술가 그룹 등이었다. 반원전 행동가들의 존재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일본의 대규모 반원전 시위에서 이들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을 터인데, 그래도 아마 이들은 ‘비밀공론장’을 계속 유지하려 할지 모른다.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후쿠시마 사고 후 한국에서도 원자력을 반대하는 많은 ‘행사’가 열렸다. 주로 토론회나 강연회였고, 참가자는 대체로 수십명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들 ‘행사’의 한가지 공통점은 원자력을 핵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토론회 제목이나 발표문에서 원자력발전이란 단어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들 안에서는 탈핵, 반핵이란 용어가 대세이다. 그런데 토론장 밖으로 나오면 그 말은 보기 어렵다. 경향,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 신문에서도 대부분 원전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보통 시민 사이에서도 원자력이란 말이 압도적 대세이다. 핵은 핵무기를 칭하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탈핵, 반핵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보통 시민은 좀처럼 쓰지 않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민들로부터 멀어지고, 결국 일본의 반원전 행동가들처럼 ‘비밀공론장’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반핵, 탈핵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원전이 핵무기와 동급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원리가 같으니 둘이 동급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원전은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폐기돼야만 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폐기가 다수 시민의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들 다수를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어떤 용어를 쓸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반핵, 탈핵이 보통 시민에게는 생소한 것이라면, 그 용어가 더 정확한 것이라도 과감히 버리고 반원전, 탈원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참여정부 때 핵폐기장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원전수거물관리센터로 개칭됐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들은 이 용어를 수용하지 않았고, 방폐장이라는 말이 대세가 됐다. 이는 시민들의 판단력이 허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전이란 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1.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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