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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복지를 ‘권리’로 본 세계인권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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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8-22 12:18 조회17,8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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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권 발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꼽는다면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트위트 메시지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한 부분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다. 종전 직후 세계인들이 세계인권선언에 얼마나 큰 기대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후의 사회진보 사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에셀이 속한 프랑스 사회당은 말할 것도 없고 서구 거의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에서 세계인권선언은 정전의 대우를 받고 있다. 예컨대 네덜란드 노동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세계인권선언에서 합의된 평화, 안전, 인권은 무한한 중요성을 가진다.” 또한 캐나다 진보이론가 로빈 시어스는 세계인권선언으로부터 새로운 좌파 이념을 재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케케묵은 듯한 외양과는 달리 그 내용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주는 지적인 충격파가 적지 않다. 특히 세계인권선언 후반부에 나오는 경제·사회적 권리 조항들은 현재진행형 빅 이슈인 복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세계인권선언의 경제·사회권 조항들이 충분치는 않다. 그러나 경제지구화 시대에 경제·사회권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흔히 알려져 있듯 선언 초안을 만들 때 자본주의 진영이 경제·사회적 권리를 반대한 건 아니다. 미국이 좀 미온적이었지만 전쟁 뒤 바로 노동당이 집권한 영국, 1946년 좌파 정당들이 연합해서 4공화국을 세웠던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은 경제·사회적 권리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복지를 실현하는 방법론, 특히 국가의 역할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 진영은 복지에 찬성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시장의 활력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고, 사회주의 진영은 국가의 강력한 역할이 없으면 교육, 복지, 건강 등의 조치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

경제·사회적 권리를 세계인권선언에 집어넣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칠레 대표단의 에르난 산타크루스다.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친구였고 라틴 아메리카 노동운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법률가 출신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모성보호와 어린이를 위한 특별지원책을 주창했고, 세계무대에서 가난한 나라들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대변했다. 어떤 이는 산타크루스의 열정 덕에 세계인권선언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인권선언들과 다른 차원의 문서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계인권선언의 경제·사회적 권리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19세기 말 이래의 사회입법 전통을 다시 이은 것이었다. 그러한 흐름에는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 사회교리 사상 등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복지가 크게 보아 진보적인 패러다임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의 기원에는 여러 갈래의 사상이 섞여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복지라는 화두가 대단히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적 어젠다로 떠올라 있다.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다. 오세훈식 함량미달의 사고방식은 논외로 치더라도, 박근혜식 보수에서 말하는 복지의 확대라는 주장이 시민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보수 복지론과 진보 복지론의 차이가 무엇인가? 양적인 차이인가, 질적인 차이인가? 진보 쪽에서는 그것을 선별주의와 보편주의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지만 용어와 논리의 추상적 성격으로 인해 일반인의 정서에 크게 어필하기 어렵다. 전문가와 활동가들에게는 상식이라 하더라도 일반 대중을 설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세계인권선언이 하나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 요컨대 복지는 경제적·사회적 권리로서, 즉 인권으로서 접근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정서상 가장 확실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한 제22조를 당당히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박근혜식의 복지시혜 정책이 복지 1.0 버전의 확장판 정도라면, 시민이 당당하게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복지권리 정책은 복지 2.0 버전이다.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보편성의 주장보다 권리의 주장이 정치적인 구호로 표현하기도 더 쉽다. <복지국가 스웨덴>(신필균 지음, 후마니타스)을 보면 사회 구성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체제로서 스웨덴 복지국가가 우뚝 서 있다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인권으로 접근해야 민주주의, 정치적 권리 그리고 경제·사회적 권리가 상호의존 관계를 이룬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나홀로 복지가 아니라, 정치적 차원의 민주주의도 함께 가는 복지가 진정한 복지라는 논리가 나오려면 인권의 불가분성 원칙에 기대는 편이 용이하다. 정치적 권리에 대해 미온적이면 경제·사회적 권리도 곧바로 추락하고, 경제·사회적 권리 없이는 정치적 권리도 보장될 수 없다. 이명박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가 진짜 얻었던 경험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라고 본다. 형식논리로만 본다면 보수주의자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경제·사회적 권리만 후퇴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보수의 수준이 그 정도에 미칠 수 있을까. 진보-개혁파들의 연합정치에 대한 아이디어도 바로 이 지점에서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민들과 모든 나라들이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된 기준으로서의 세계인권선언”이라는 구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몇 년은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될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복지와 민주주의와 한반도 정세를 함께 생각해야 할 새로운 진보의 방향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 201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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