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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 상상된 중국과 살아있는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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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6-14 19:48 조회20,0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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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문학포럼 덕분에 중국 작가 한 샤오꿍(韓少功)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서남(瑞南) 10주기 추모 동아시아 국제학술대회(1999) 이후 무려 13년 만의 재회다. 그가 서남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은 백영서(白永瑞) 교수의 추천인데, 한 샤오꿍은 중국 뿌리찾기파[尋根派]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그 자신 뿌리찾기파로 분류되는 것에 불편해 하기도 하지만, 나의 제한된 독서경험에 의지해서도, 그는 민족주의와 지방주의로 복고하는 단순한 뿌리찾기파가 결코 아니다. 서양의 담론을 예민하게 독해하되 그에 혹(惑)하지 아니하고, 중국의 현실을 내재적으로 분석하되 또한 예리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 놀라운 균형감각은 그 오래된 나라의 풍요로운 지적 전통에 말미암은 바 적지 않기에 한 샤오꿍이야말로 뿌리찾기파의 본때를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13년전 서남회의에서 만나기 전 부끄럽게도 나는 그 이름조차 몰랐다. 이웃나라의 살아있는 문학에 이처럼 무식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한국사람들은 중국을 잘 아는 듯이 군다. 지금도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고전들이 스테디쎌러인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고문(古文), 백화(白話) 또는 번역으로 독서한 중국은 살아있는 중국이 아니다. 물론 안 읽은 사람보다야 낫겠지만, 독서로 구성된 중국관이 일종의 선입견으로 작용하여 오히려 현실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을 가로막기도 하기에 어떤 점에서는 더 나쁠 수도 있다. 1995년 여름, 처음 중국에 갔을 때의 당혹을 잊을 수 없다. 청뚜(成都)의 어느 음식점에서 첫 숟가락을 뜨는 순간 어, 나는 여행 내내 음식 때문에 고생한 못난이를 면치 못했다. 그동안 중국 가서 요리 때문에 고전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속으로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기에 더욱 민망했다. 청관(淸館)이라 불리는 차이나타운에 익숙한 인천(仁川)에는 짜장면의 고향답게 청요릿집 또는 만두가게 들이 동네마다 들어와 백여 좀 과장하면 중국요리는 거의 한국요리에 준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한국식 중국요리를 중국식 중국요리로 착각했다가 이런 꼴을 당하니 창피가 막심이다. 굴비를 가져온 선배의 도움으로 근근히 연명하면서 나는 상상된 중국에 대한 살아있는 중국의 복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절감하던 것이다. 음식 못지않은 복수는 문자다. 현대문학하는 패치고는 한문을 곧잘한다는 선배들 칭찬을 은근히 자부한 터인데, 한문의 본토 중국에 와서 나는 거의 까막눈 신세로 떨어졌다. 성조(聲調)야 원체 음치니 하릴없거니와, 도대체 읽을 수도 없으니 이 무슨 망신인가. 간자(簡字)는 공포의 문자옥(文字獄)이었다. 나의 첫 중국여행은 정말로 쓴 약이었다, 몸과 마음에 두루 유익한.

 

1995년에 복용한 양약(良藥) 덕분에 ‘오늘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대한 자각이 늦깎이치고 일러진 것은 다행이거니와, 그 자극이 된 이들 가운데 하나가 한 샤오꿍이다. 서남회의에서 그의 토론을 들으면서 나는 만만치 않은 내공을 쌓은 중국지식인을 비로소 대면하게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중국에 아시아가 있느냐’는 백 교수의 질문에 ‘중국이 정말 아시아에 관심을 기울이면 어찌할거냐’고 반문하는 그의 발언은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중국에 가서 놀랜 것 가운데 또하나는 ‘중서(中西)’다. 한국에서 ‘동서(東西)’라고 할 말을 중국에서는 ‘중서’라고 하니, ‘중’이 곧 ‘동’이라는 정치적 무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에도 근대 일본처럼 아시아가 부재한다는 이 깨달음은 새삼 한국의 곤경을 의식케 하거니와, 일본은 으레 그러리라 치부했다 하더라도 중국조차 그렇다면 이는 정말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내심 여겨오던 터였다. 그런 차에 들려온 그의 반문은 참신하기조차 하다. 과연 중국이 아시아의 일원이 아니라 일본처럼 아시아를 타자화한 전철을 밟는 차원에서 아시아의식을 강화한다면 아시아에 무관심한 게 다행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중국에 대고 그냥 아시아로 돌아오라고 해서는 자칫 일본꼴이 날 우려도 없지 않다는 점을 에둘러 지적한 셈이다. 물론 이는 역설이요 반어다. 그뒤 그의 산문집 『열렬한 책읽기』(백지운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8)를 뒤적이다가, 아시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과정에서 나온 마오 쩌둥(毛澤東)의 ‘제3세계론’이 결국 중국을 보위하기 위한 혁명수출론, 다시 말하면, 애국주의의 부활에 지나지 않았음을 통렬히 지적한 대목(250~51면)에서 그 반문의 문맥을 더 분명히 짐작하게 되었다. 마오의 제3세계론이 죄 많은 일본아시아주의의 붉은 버전으로 진화할 징후를 간파했기에 그 역시 한국의 동아시아론에 대해 그런 반어를 던졌던 것이다. 한 샤오꿍이야말로 나를 살아있는 중국적 사유로 인도한 안내자였다. 살아있는 중국에 온전히 다가가려는 노력이 가장 절실한 실천적 과제의 하나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중국민중의 육체와 영혼 깊숙이 스며든 존엄에 대한 요구에 기초하여 오늘날 중국의 곤경을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 사유하는 한 샤오꿍의 존재는 중국을 위해서만 미쁜 것은 아닐 것이다.

 

최원식(인하대 한국어문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통신. 201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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