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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독일에서 다시 생각하는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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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10-13 22:37 조회17,8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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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마디 이론이나 분석보다 잠깐의 인상, 짤막한 관찰이 더 깊이 기억될 때가 있다. 노동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독일에서 마주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상이 그렇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그것은 원칙일 뿐 실제 삶 속에서 그 원칙이 지켜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낀다. 그런데 일상의 차원에서 독일 사회의 평등성은 확실히 우리보다 앞서 있다.
 

동네 슈퍼마켓 계산대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 기름과 먼지로 범벅이 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가 함께 서 있는 광경을 흔히 본다. 그 사람의 앞뒤로 아주 고급스런 복장의 부인, 그리고 넥타이 정장 차림의 신사가 같이 줄을 서 있다. 이런 광경이 기본적으로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광경에서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복장의 사람들, 한눈에도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런 표정으로 서로 눈인사를 하기도 하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모습을 이색적으로 바라보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될 판국이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노동자는 계산을 끝낸 뒤 카운터 직원과 한참 동안이나 즐거운 ‘담소’를 주고받는다. 바로 뒤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귀부인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중에 말이다. 그 노동자나, 카운터 직원이나, 뒤에 서 있는 부인이나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 광경을 딱 집어 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직업적·계급적 격차가 있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거리나 이질적 의식이 우리 사회보다는 확실히 적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슈퍼마켓에서의 내 관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후 3시 혹은 밤 9시쯤이 되면 카운터 직원들이 교체된다. 조금 전까지 계산을 하던 아주머니 직원이 어느새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장바구니를 들고 매장에서 물건을 고른다. 그런 뒤 계산대에 가서 여느 손님과 똑같이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쇼핑을 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별것 아니면서도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집 앞에서 보도블록을 깔고 있는 일꾼을 본 적이 있다. 네모나게 깎은 손바닥 절반만한 작은 돌을 보행로 바닥 땅에다 망치로 박고 있었다. 그 넓은 보행로 전체에 그런 식으로 돌을 하나하나 토닥토닥 도토리 심듯이 보행로를 깔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나, 거기에 투입되는 정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 보였다. 일꾼은 돌멩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망치로 박으면서 노동 자체에 몰입하고 느긋하게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노동하는 한 인간이 몰입해서 일에 진정으로 빠져 있는 광경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며칠 후 동네 슈퍼마켓에서 그 일꾼이 작업복 차림으로 장을 보러 온 것을 보았다. 그 사람 역시 수많은 손님들 사이에서 전혀 구분되지 않고 똑같이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 장을 보고 천천히 계산을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꿈꿨던 사회가 이런 식으로 인간화된 사회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일의 성격에 따라 직업의 특징이 다르더라도 모든 인간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 말이다. 노동을 진정으로 즐기고 몰입할 줄 알며 누구로부터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공동체에 속한 노동자들의 세상, 이것은 계급의 문제나 노동시장의 문제 차원을 벗어나 우리 사회의 정신의 문제,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태일 열사는 사십년 전에 이 점을 이미 꿰뚫어 보았고,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신을 오롯이 바쳤다. 그의 시선이 준열하면서도 또한 따뜻한 것은 아마 그의 이런 혜안, 열사의 이미지 뒤에 서려 있는 소박한 인간애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조효제 독일 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한겨레. 2010.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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