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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더 나은 모두스 비벤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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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3-31 07:16 조회17,8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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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 주지’ 발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안 대표는 이번 논란 이전에도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해 좌파 교육과 성폭력 사범의 상관관계를 거론한 분이니 그가 ‘좌파 주지’ 발언을 했다는 것에는 별로 의심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논란거리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 대표 발언의 부적절성을 지적하며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말이 은연중에 ‘빨갱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안 대표의 마음속에 들어가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흉중에서 처음 떠오른 표현이 ‘좌파 주지’가 아니라 ‘빨갱이 주지’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것이 지나친 상상일까? ‘좌빨’이라는 표현이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에 그토록 횡행하는 것을 보면 그리 무리한 추정은 아닌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왜 정작 언표된 것은 ‘빨갱이 주지’가 아니고 ‘좌파 주지’였을까? 검열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 성원들 사이에는 공인이라면 빨갱이라는 말만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모두스 비벤디’(잠정 협정)가 존재하며, 이 모두스 비벤디가 빨갱이를 좌파로 변형한 힘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좌파라는 말은, 민주화에 힘입어 공론장에서 빨갱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금지된 사회에서 여전히 빨갱이라는 말을 연상시키기 위해서 선택되는 어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수 인사가 그 단어를 택할 때는 그런 것 같다. 현 정부 아래서 이런저런 보수 인사들이 ‘좌파 적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난폭한 외과 수술적 비유 밑에는 좌파를 부패한 장기 혹은 암덩어리쯤으로 간주하는 사고, 어떤 성향의 인구집단을 정치체로부터 영구적으로 추방하려는 내전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런 상상력의 뿌리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이 ‘빨갱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체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확실히 분단체제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고 안에서는 좌파/우파라는 근대 정치의 근본 범주가 정치 프로그램과 이념의 정렬을 묘사하는 중립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반공투사/빨갱이의 구분을 겨우 억압하고 대치하는 구분법 구실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우파의 구분법으로부터 그것과 경합하며 쓰이고 있는 보수/진보의 구분법으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 보수/진보의 구분법은 더 이상 역사적 과거로 소급하지 않으면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균열선에 대응하는 정치적 정렬 방식을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여론조사에서 밝혀졌듯이 좌파와는 달리 진보라는 표현에 대해 우리 국민은 별 거부감 없이 그것을 하나의 정치적 프로그램과 이념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보수/진보라는 구분법을 모두스 비벤디로 삼을 때, 내전과 투쟁이 아니라 국민적 정치공간에서의 정상적 경쟁이 정치적 사유의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러기 위해서는 몹시도 보수편향적인 사회라서 극우가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태에 대한 분노를 접고 그것을 우리의 역사적 현실로서 수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경우 ‘좌빨’이라는 표현 혹은 여전히 빨갱이를 연상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좌파’라는 말을 공론장에서 추방하려면 ‘꼴보수’라는 표현 또한 함께 폐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에른스트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프랑스인들이 하나의 민족이 되려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잊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도 우리의 일부를 외부로 추방하는 정치를 종식하고 내부화하려면 더 이상 상기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며, 그런 의지에 힘입은 모두스 비벤디가 필요한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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