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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남보원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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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2-17 08:14 조회19,2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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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에 작은딸과 함께 앉아 몇년 만에 개콘(개그콘서트)을 보았다.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솔로천국, 커플지옥’,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 봉숭아학당의 ‘동혁이 형아’가 실제로 어떤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함께 보던 작은딸이 투덜거렸다. 아빠가 보면서 잘 웃지 않으니 자기도 잘 안 웃게 돼서 같이 보는 게 더 재미없다는 거다. 사실 잘 웃게 되지를 않았다. 잘 만들어진 코너도 있었지만, 몇몇 코너는 육체적 학대가 심해 좀 편치 않았다. 잘 만들어진 코너도 편하게 웃을 수 없는 데가 있었다. 내게는 남보원이 특히 그랬다. 개콘을 본 날이 밸런타인데이였는데, 이런 날 남자들이 겪는 괴로움을 풍자한 대사도 운율감 있게 잘 구성되었고 남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공감도 불러일으킬 만했지만 메시지가 구성되는 방식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개콘을 통틀어 현역 정치인으로 분장한 개그맨이 나오는 경우는 남보원의 강기갑 의원밖에 없고, 진보정당 10년의 성과로 스타 정치인이 생겨나 그런 정치인이 개그 프로그램에서 비중 있는 배역에 활용될 정도로 대중적 친밀감을 얻은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이 지적했다. 그 점은 나도 십분 동의한다. 확실히 이렇게 일상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보수언론이 의회 내의 투쟁 사진 한두 장을 활용해 ‘공중부양’ 운운하며 과격한 이미지를 덧씌우기는 어려울 듯싶다.

 

하지만 남보원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에는 퇴영적이거나 최소한 모호한 면이 있다. 북을 두드리며 사무직 노동자 분위기를 내는 최효종, 붉은 머리띠와 조끼를 입고 민주노총 조합원의 이미지를 풍기는 황현희, 그리고 강기갑 의원으로 분한 박성호로 구성되는 남보원은 노동해방의 정치를 성 정치의 프레임에 이식해 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프레임이 전환될 때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여성을 옹호하는 위치가 아니라 남성을 방어하는 자리이다.

 

물론 남성의 자리에서 방어해야 할 것이 있을 수 있다.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는 시대에 어떤 여성들은 여성해방의 성과와 전통적인 성역할 분화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모두를 약삭빠르게 챙기려 할 것이다. 그런 여성들 앞에서 어리숙한 남성들이 느끼는 당혹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사회적 해방을 위해 일부 필요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개그 프로그램이 그런 경험들을 저녁시간의 한바탕 웃음을 위해 동원하는 일이 그럴듯할 수 있다.

 

하지만 남녀의 데이트나 부부의 갈등 상황에서 나타나는 국지적인 남성차별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몸짓과 구호가 동원됨으로써 오히려 해체되고 조롱당하는 것은 계급정치가 아닐까? “민주화되고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민노당의 대표적인 구호가 남보원 안에서 여성들에게 징징대는 옹졸한 구호로 변질되고, “(여자친구 집에) 한우세트 보냈더니 (우리 집에는) 비누세트 돌려주냐”며 주목을 불끈 쥐고 외치는 모습 속에서 노동운동의 전통적인 근육질 남성주의는 인권 뒤에 숨어 줄어드는 특권을 지키려는 치졸한 남성주의로 전환되고 있다.

 

남보원이 진보정치와 대중 사이의 친밀성을 반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강화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속에서 더불어 폭로되는 것은 진보정치의 상투성,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오래된 불화, 그리고 진보정치가 여성을 비롯한 모든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하기는커녕 어떤 특권과 은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대중적 이미지다. 그러니 남보원을 보며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지나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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