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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법원 공격과 반(反)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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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1-28 08:24 조회23,9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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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보도에 대해 검찰은 법원을 공개적으로 공박했고, 정치권과 보수단체에서는 법원의 '이념'을 규탄했다. 그러나 광우병의 위험은 '지식'(knowledge)에 관한 문제이다. 권력기관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애초에 PD수첩이 좀더 신중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지식의 문제를 검찰이나 정치권이 권력적으로 다루려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PD수첩 판결 자세는 합리적

이번 사안의 경우 법원은 자신의 책무에서 비교적 충실했다고 본다. 지식의 진위를 법원이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러나 법원은 검찰이 기소한 문제를 떠맡은 것이므로 판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PD수첩은 미국산 쇠고기가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광우병과 관련된 문제는 일반적 지식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특수한 지식의 문제이다. 특수한 지식은 흔히 과학적 지식, 개성적ㆍ국지적 지식, 집합적ㆍ암묵적 지식으로 나누어지는데, 광우병 문제는 아직은 전문가 집단에서 과학적 지식으로 체계화된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 화학첨가물, 환경오염 물질 등에 의해 유발되는 질환은 그 위해가 만성적이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급성질환과는 달리 만성질환의 경우 인체에 미치는 위험을 평가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과학적 지식과 규제조치들은 아직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광우병에 대한 입장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미국, 유럽, 일본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PD수첩의 주장도 다양한 입장 중의 하나이다.

검찰은 PD수첩의 의문을 문제 삼았다. 주저앉는 소들이 광우병에 걸렸을 수 있다는 것, 죽은 아레사 빈슨이 인간광우병에 걸렸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 한국인이 광우병 쇠고기를 먹으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보도를 검찰은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는 PD수첩의 의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PD수첩 보도의 진위를 재판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법은 규범과 당위의 세계를 다룬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고정되지 않은 존재의 세계를 법원이 판결하도록 한다면, 시장과 국가의 영역을 구분한 근대사회일 수 없다. 천동설이 옳은지 지동설이 옳은지 분명하게 확정할 수 없는데, 그 주장들을 재판한다는 것은 난센스일 수밖에 없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법원은 PD수첩에 대해 비교적 합리적인 스탠스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정정보도를 청구한 민사소송에서는 PD수첩의 보도를 허위로 판결했지만,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한 형사소송에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어찌 보면 어정쩡한 결과이지만, 또 어찌 보면 과학적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법원의 여러 부분이 분권적으로 지혜를 모은 '집합적 지식'으로 평가할 수 있다.

법원을 공격한 세력들은 법원의 이념 과잉을 문제 삼기보다는 자신의 이념 빈곤을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물론 법은 정의, 효율성, 법적 안정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법 해석은 빅 브라더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정 세력의 법 해석 독점과 그에 따른 판결의 일관성은 전체주의로의 초대장일 뿐이다.

지식과 분권화의 문제 잘 봐야

자유주의자 하이에크는 일찍이 지식의 분권적 이용이 체제와 관련된 문제임을 지적한 바 있다. "지식은 분산되어
있고 불완전하며 종종 모순적이다.…우리가 사회의 경제문제가 주로 시ㆍ공간의 특정 환경변화에 대한 신속한 적응의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면, 최종적 의사결정권은 그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맡겨져야 한다.…우리는 분권화의 형태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지식의 형성과 이용은 분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국가나 정치세력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반(反)자유주의적 행동이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한국일보. 2010.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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