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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냉동된 재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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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1-11 08:41 조회20,0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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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처지를 담담하게 진술했다. "불에 그슬린 그대로 /150일째 다섯 구의 시신이/얼어붙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다."(송경동, <이 냉동고를 열어라>)

그러나 각박한 말도 많았다. 임차인들이 지주의 소유권을 침해했다는 주장도 나왔고, 보상금이 과하다는 소문도 계속 뿌려지고 있다. 용산 참사의 발단은 도시 재정비 사업의 진행과정에서 임차인의 권리금이 인정되지 않은 데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재개발 지구 세입자의 권리금은 합법 체제의 바깥에 있다.

용산참사와 법 밖의 재산권

권리금은 영업시설, 거래처, 신용, 영업 상의 노하우 등 무형의 재산 가치에 대한 대가이다. 법이 인정하지 않는 권리금이라고 해도 재산권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경제학에서 재산권은 법률적 권리보다는 경제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재산권은 '자원 이용을 위한 개인의 권리'로 정의할 수 있는데, 그 것은 법 아래 부속된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재산권에 대한 정의는 비교적 현대적인 것이지만, 소유권에 관한 묘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의 고대문명에서는 소유권은 다른 권리에 의해 제한을 받는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에 와서 소유권은 일체의 외적 조건과 제한을 배제한 존재로 신분 상승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소유권은 불투명한 경제적 스펙트럼 안에 있었지만 로마라는 프리즘을 통하면서 선명하고 순수한 빛깔을 띠게 되었다. 로마는 토지뿐만 아니라 인간(노예)까지도 절대적인 소유권의 대상으로 삼았다.

로마 법학 이래 소유권은 성문법의 세계로 들어왔다. 그러나 성문법이 일반 시민들의 생활방식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불법적인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근대세계의 입구에서 산업혁명은 대규모 이주와 불법적인 영역의 성장을 가져온 바 있다.

서유럽 국가들도 개발도상에서는 로마법과 초창기 식민지법을 동원하여 완강하게 기존 소유권만을 보호하고자 했다. 튜더왕조의 영국은 교외에서 자생하는 공장들을 불법화하고 규제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불법적인 기업가에게 노예형 교수형, 심지어 형차에 찢겨 죽게 하는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질수록 불법도 많아졌다. 결국 19세기를 통해 유럽 국가들의 법 체제는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재산권의 역사에서도 합법적 체제와 불법적 현실의 갈등이 맹렬했다. 초창기 이주민들은 영국 법을 따르는 이들이었으나 신대륙에서 영국 법은 통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무단 점거를 해야 했고, 그렇게 형성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법 체제를 제정했다. 그 뒤의 이주민들은 다시 법 밖에 있는 무단점거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을 보장받으려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미국 의회는 무단 점거자들의 불법적 관례를 승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최고의 능력을 지닌 개척자로 바꾸어 호명되고 경의의 대상이 되었다. 유명한 1862년의 홈스테드법도 이미 정착하고 있던 이주민들의 관례를 그대로 통과시킨 것이다. 미국은 엘리트들이 제정한 법 체제에 이주민들이 제정한 불법적인 규약을 포용했다. 이로써 합법적인 체제가 소수를 위한 예외가 아니라 대다수를 위해 운영되는 보편적 질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선진화는 기득권만을 고집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 밖의 재산권을 합법화하면서 냉동된 채로 있었던 거대한 재산에 숨결을 불어 넣어야 한다. 합법과 불법의 갈등을 통합해야 새로운 자본이 창출될 수 있고 그것이 선진화의 경제적 기초인 것이다.

권리금은 여전히 냉동상태

불에 그을린 시신은 150일을 훌쩍 넘어 1년이 다 되어서야 냉동고에서 나오게 되었다. 시신은 땅에 묻혔지만, 그들의 권리금은 아직 냉동되어 있다. 그러니 이어지는 시인의 외침에 공감하게 된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이 냉동고에 우리의 권리가 묶여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미래가 묶여 있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한국일보. 2010.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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