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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독일 ‘평화적 혁명’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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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5-14 08:33 조회17,6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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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독일에서 흥미있는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베를린의 알렉산더광장에서 열린 ‘평화적 혁명과 장벽 붕괴 20주년’ 전시회가 그것이다. 수많은 사진자료와 전시물이 공개되고 있었다. 5월7일을 개막일로 잡은 이유는 20년 전 ‘평화적 혁명’이 시작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흔히 1989년 11월9일의 베를린장벽 붕괴만을 기억하지만 그 전부터 ‘평화적 혁명’은 시작되었다. 1980년대 이미 동독 내부에서 체제 개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개신교 교회와 각종 민간조직들이 인권, 군사화, 환경, 교육, 도시 문제 등을 놓고 적극적으로 토론과 비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89년 5월에 열린 지방의회 선거에서 사건이 터졌다. 집권 민주사회당이 만장일치에 가깝게 승리했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물론 부정투표 결과였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5월7일 알렉산더광장에 모여 규탄집회를 열었고 그 후 매월 7일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동독 내에서 직접행동형 정치모임이 가시화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독자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이다.

 

따라서 전시회는 지금부터 20년 전에 시작되었던 동독 내부의 정치적 변화에 초점을 맞춰 독일의 현대사를 복원하려 한다. 그런데 아직도 ‘평화적 혁명’과 장벽 붕괴 사건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어를 찾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화적 혁명’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개혁이었던가, 통일이었던가, 자본주의 지향이었던가? 지난 금요일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강조한 것은 그 모두였다. 즉, 동독은 감시와 밀고가 일상화되고 사법부 독립이나 자유 언론이 본질적으로 억압당했던 불의한 정부였으므로 붕괴되어 마땅했다는 것이다. 통일 독일의 정당성 앞에서 한가하게 옛 향수를 운위할 계제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옛 동독 주민들에게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가 가혹하다고 해서 과거를 용인할 순 없다는 태도였다. 반면 좌파들의 진단은 뉘앙스가 달랐다. 즉, 대다수 동독인들이 전체주의와 거주·이전의 제한에 반대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수입하려 들지는 않았고, 통일을 향한 움직임으로 애초 혁명이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로베르트 베헤르트 같은 사람은 적어도 혁명 초기에는 스탈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사회주의적 제3의 길 노선이 있었지만 그것을 끌고 갈 세력이나 정당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와중에 만난 신자유주의가 동독에 재앙 수준의 불행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눈으로 보면 좌우파의 해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통의 주제어가 뚜렷이 보인다. 그것은 인권과 민주주의다. 첫째, 시민들에게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정치는 그것이 추종하는 이념이 무엇이건 외면받을 수밖에 없고, 후대에 가서도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둘째, 제정신을 가진 대다수 사람들은 넓은 뜻에서의 민주주의를 원한다. 사람들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먹고사는 민주주의를 모두 원하기 마련이다. 또한 아무리 작디작은 사람이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의사 결정을 위한 좋은 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 못지않게, 참여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로서도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평화적 혁명’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한국인에게도 중요한 표상으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섬광 같은 표상 말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09.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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